날짜 : 2009.01.04
예배명 : 신년예배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최고의 해
성경본문 : 사사기 11장 1-11절, 29-33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Sermon_20090104.wmv
클린톤 대통령의 이야기를 잘 아실줄 압니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32세에 미국 역사상 최연소로 주지사에 당선이 되었고 46세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본인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성공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법대를 갓 졸업하고 인생을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슴이 뜨거웠던 젊은 시절, 나는 즐겨 읽던 소설과 역사책을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실용서 한 권을 사서 보았다. 앨런 라킨이 쓴 ‘시간과 인생을 통제하는 방법’이라는 책이었다. 이책의 요점은 단기, 중기, 장기 인생 목표를 나열한 다음 중요도에 따라 구분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A그룹에는 가장 중요한 것, B그룹에는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 C그룹에는 마지막 목표들을 집어넣고, 각 목표마다 그것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 행동을 적어야 했다. 나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그 책을 갖고 있다.”
클린톤 대통령이 여러가지로 구설수에 오른 사람이긴 하지만 최소한 그가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인정할줄 압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그는 자신의 목표를 뚜렷이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머리 속으로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글로 적어서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자신의 목표를 글로 적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글로 적었던 두 분을 더 소개해 드립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죠지 워싱톤 대통령도 자신의 목표를 글로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할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될 것이다. 나는 군대를 이끌 것이다. 나는 미국을 독립시키고 대통령이 될 것이다.”
그가 가장 큰 부자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것들은 거의 모두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역시 글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더 소개해 드리면…, 이번엔 대통령이 아닌 다른 사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영화배우 이소룡은 다음과 같이 종이에 기록을 해 놓았다고 합니다.
“나는 1980년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동양인 배우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천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을 것이다.”
물론 그의 꿈도 이루어졌습니다.
이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들의 꿈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끼게 됩니다. 아니 그것도 그냥 꿈이 아니라 우리가 손수 글로 적어 놓은 꿈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새해 벽두부터 목사님이 너무 세상적인 축복을 사모하게 하는 말씀을 하신다고 걱정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세상적인 축복도 우리가 종이에 기록하고 꿈을 꾸면 이렇게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록하고 꿈을 꿈꾸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2009년 신년예배를 드립니다. 신년들어 아직 꿈과 소원을 종이에 기록하지 않으신 분들은 오늘 중 종이에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그것은 젊은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젊은이나 나이드신 분이나 모두 필요하다고 봅니다.
새 해 전날 저녁 식사를 하는데 집사람이 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내일이면 한국 나이로 57세네.” 제가 잠시 있다가 대답했습니다.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3년 지나면 환갑이야.” 그 말을 하고 나니 새 해가 더 없이 소중해 보였습니다. 환갑전의 3년 얼마나 소중합니까? 사실 젊은 시절은 젊은 시절 나름대로 한 해 한 해가 소중했습니다. 요즘도 저는 젊었을 때 많이 읽어 두었던 성경말씀으로 목회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젊은 시절의 한 해 한 해는 무척 소중합니다. 젊은 시절의 우리의 경험은 일생토록 영향을 미치니 말입니다. 반면 나이 들어서의 한 해 한 해도 무척 소중합니다. 다른 면으로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날들이 얼마 남았는지 모르니 더 없이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아울러 젊은 시절의 삶이 열매맺은 해이니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결단했습니다. “올 한 해를 최고의 한 해로 만들어야지.” 그런데 결단만 하면 되나요. 글로 써야죠. 그래서 식사 후에 종이 하나를 꺼내서 썼습니다. “2009년도를 최고의 한 해로 만들자.” 종이에 쓰는데 기분이 달라지더라구요. 이미 최고의 해가 된 확신이 들더라구요. 그리고 책상 앞에다 붙여 놓았습니다.
우리 집 사람도 나중에 저의 표어를 읽더니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더라구요. 그런 표어를 쓰게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2009년도를 최고의 한 해로 만들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단을 종이에 기록하시기 바랍니다. 기록하신 종이를 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최고의 한 해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인가? 사실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삶은 다 다를줄 압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은 우리들 각자의 형편에 맞게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은 우리 교회에 주시는 최고의 축복은 무엇일까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저는 2009년도 우리 교회에 주시는 최고의 축복의 모습을 찾아 보았습니다.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사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 생활을 마친 후 곧 가나안 땅에 들어 와서 시작됩니다. 사울왕이 세워지기까지 400년간의 기간을 사사 시대라고 하는데 이때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에 위기가 올 때마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일으키셔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한편 생각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놀라운 모습을 봅니다. 그 어느 민족이 지도자 없이 400년을 지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중 입다 사사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 2절 말씀입니다.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길르앗 사람으로 큰 용사 입다가 있었는데 이 입다는 기생이 나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용사 입다의 아버지의 이름도 길르앗입니다. 곧 길르앗은 지명 이름도 되고 사람 이름도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길르앗의 아들들이 입다를 집에서 쫓아 냅니다. 이유는 기생의 아들이니까, 서자라는 의미일줄 압니다. 3절 말씀입니다.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입다가 도망을 가서 돕 땅에 거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소식을 전하여 들은 잡류들이 -잡류라고 하면 거리의 불량배라고 생각하면 좋을줄 압니다- 몰려왔습니다. 불량배들의 두목이 된 셈입니다. 그런데 그 때 어떤 일이 생길까요? 4절 말씀입니다.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암몬 자손이라고 이스라엘과 이웃 사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이 좋은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때마침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5, 6절말씀입니다.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입다를 쫓아낼 때는 언제고 이제는 다시 데려 오려고 합니다. 입다에게 가서 말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장관이 되라.” 이에 입다가 뭐라고 말할까요? 7절 말씀입니다.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입다로서는 당연히 할수 있는 말이겠죠. 이에 장로들은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11절 말씀까지 보면 결국은 입다가 길르앗의 머리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입다는 하나님께 고합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보면, 과연 이 이야기와 우리 교회의 최고의 해와 무슨 관계가 있나 궁금해지실줄 압니다. 두 번째 본문을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29절 말씀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봉독하지 않은 12-28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암몬과 전쟁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전쟁을 할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기생의 아들, 잡류의 두목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채 암몬 자손에게 나아간 것입니다. 32, 33절 말씀입니다.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이스라엘이 입다로 인해서 통쾌한 승리를 거둡니다. 이스라엘은 최고의 해를 맞이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기생의 아들 사사 입다를 통해서 최고의 해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교우님들은 더 궁금해 지실줄 압니다. “아니 우리 교회의 최고의 해와 기생의 아들 입다와 무슨 상관이 있나? 우리도 기생의 아들을 찾아서 나서야 한단 말인가?” 제가 입다의 이야기를 새해 벽두부터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사시대 400년간 이스라엘 민족은 이와 같은 승리를 많이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입다를 통한 승리는 다른 승리와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입다의 승리가 주는 특별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러면 입다의 승리가 다른 사사들의 승리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왜 입다를 통한 승리가 어떤 승리보다도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수 있게 됩니다.
이 400년간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사사는 모두 하나님의 신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입다도 하나의 사사로서 하나님의 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을 받는 과정이 입다와 다른 사사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입다는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신을 받았습니다.
비교를 위해서 몇몇 사사들이 하나님의 신을 받는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사 시대에 많은 사사들이 있었지만 그 중 눈에 띄는 6명의 사사가 있습니다. 이를 6대 사사라고 합니다. 제일 잘 알려진 사사가 삼손, 그리고 기드온 또 여자 사사로서 드보라가 있습니다. 여기에 오늘의 주인공 입다까지 합하면 4명이 됩니다. 이외에 옷니엘과 에훗이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관계상 두 사사의 하나님의 신을 받게 되는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옷니엘 사사의 이야기입니다. 사사기 3:9, 10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으매 여호와의 신이 옷니엘에게 임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기드온의 이야기입니다. 6: 6, 12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역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으로 인해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났습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여호와의 신이 임합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당신의 사사들을 세우셨습니다. 6대 사사중에 다섯명을 세우셨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어려운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사사를 세우사 당신의 신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를 직접 택하시고 세우신 것입니다. 반면 사사 입다는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라 집에서 쫓겨나 불량배들과 어울려 지내고 있었습니다. 암몬 자손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 아닙니다. 대신 장로들이 소외된 자들 가운데 지내고 있는 입다를 찾아 간 것입니다. 입다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장관이 되라.” 장로들이 찾아간 입다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실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합니다. 장로들이 선택한 입다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로인해 이스라엘은 최고의 해를 맞이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님께서 어느 것을 더 기뻐하셨겠나 생각해 볼만합니다. 첫 번째 경우는 곧 다섯 명의 사사를 세우는 때의 일입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해서 사사를 세우셨습니다. 두 번째 경우는 곧 입다는 세울 때입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들은 전에 자기들이 버린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자기들이 무시하던 사람 그래서 지금 소외된 자들 중에 있는 자를 찾아 가 권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장관이 되라.” 이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다구요? “너희가 나에게 부르짖지 않고 너희 마음대로 사람을 정해서 그를 의지해?” 하시면서 진노하셨나요? 도리어 그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니 인정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놀라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반하신 것 같습니다. 결국 입다에게 당신의 신을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최고의 해가 되게 하셨습니다.
어느 것이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며 부르짖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들이 버렸던 자, 불량배들의 두목이 된 자, 그 동안 무시하고 무시했던 소외된 자를 찾아 가는 것입니까? “당신은 우리들의 장관이 되라”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느 것을 더 기뻐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면 질문을 오늘 21세기 자본주의 나라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돌릴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어떤 행위를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까요? 문제가 있을 때 부르짖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동안 무시했던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우리가 한 때 버렸던 사람들을 찾아 가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삶의 지혜를 찾는 것일까요?
역사상 요즘처럼 지식이 판치는 세상은 없었을 것입니다. 매스미디어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하여 세상지식은 홍수가 날 지경이 되었습니다. TV만 틀면 세상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줄지어 나와서 세상일을 분석합니다. 대학교수들도 예날에는 상아탑 안에만 갇혀 있었지만 요즘은 제각기 TV에 출연해서 자기의 전문지식을 세상에 알리면서 세상사를 논합니다. 저도 사실 세상사를 알려고 또 이해하려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TV News 채널을 켜 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적 토론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혜를 찾아보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를 어디서 찾을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되나요? 물론 부르짖어야 할줄 압니다.
오래전 한 기독교 잡지에서 본 만화가 생각이 납니다. 높은 산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 주세요. 우리가 이렇게 부르짖는데 어디 계십니까?” 반면 산 밑에서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나 여기있다.” 예수님은 높은 산 기도원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 틈 사이에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장로들이 체면 몰수하고 입다를 찾아 갔아 갔습니다. 세상 안에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불량배들의 무리를 찾아 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기쁘게 당신의 영을 입다에게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입다를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최고의 해를 허락하게 하신 것입니다.
신년 예배를 맞아 저의 개인을 향한 마음의 소원이자 저희 교회를 향한 저의 꿈은 바로 이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올 해 최고의 해를 맞이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해는 교육관이 완성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을 찾아 갈 때 이루워진다고 생각합니다. 소외되고 버려졌던 사람들이 저희 교회 안에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합니다. 아니 깜짝 놀랍니다. 최고의 해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것을 올 해 우리 함께 꿈꾸십시다. 전 교인이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을 찾아가는 장면을 꿈꾸십시다. 전 교인이 오늘의 입다를 만나러 가는 모습을 그려보십시다. 세상적인 꿈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이러한 꿈을 갖고 새 해를 맞이하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폴란드의 시인 시프리안 노비드(Cyprian Norwid)가 옛 그리스의 문호 호머(Homer)의 작품세계를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There in every beggar and foreign wanderer the first suspicion was whether or not he might be God… It was impossible to host anyone without first asking: who is this stranger? But only because one respected the divinity in him, did it come down to human questions, and that was called hospitality, which was why it was counted among religious practices and virtues. There was no ‘last person’ among Homer’s greeks! He was always the first, that is, divine.”)
“거지들이나 나그네를 만났을 때 첫째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사람이 하나님일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 누구를 맞이할 때 우리는 이 질문을 하게 된다. ‘이 나그네는 누구일까?’ 그러나 나그네의 신성에 경의를 표한다면 우리는 결국 그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이웃 대접은 종교적 선행으로 자리를 굳혀가게 되었다. Homer의 작품 세계에는 ‘나중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다 첫째가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신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나그네와 불량배들을 찾아 갈 때 우리는 버려진 신적인 존재를 찾아 가는 것입니다. 버려진 신적인 존재를 찾아 갈 때 하나님의 신이 새로이 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우리들 주위에는 버려진 신적인 존재들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우리들을 위한 버려진 신적인 존재들입니다.
작년도 교회 표어가 “잃은 영혼을 찾아서”였습니다. 건축에 매여서 잃은 영혼을 보지 못할까 우려가 되어서 정한 표어였습니다. 건축을 마무리짖는 올 해도 이 표어를 계속 지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적인 존재들을 찾기 위하여 건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신적인 존재를 찾는 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함께 잃어버린 신적인 존재를 찾아서 떠나십시다. 그들의 손 안에 우리를 위한 귀한 열쇠가 들려져 있습니다.
작년도 교회 표어가 “잃은 영혼을 찾아서”였습니다. 건축에 매여서 잃은 영혼을 보지 못할까 우려가 되어서 정한 표어였습니다. 건축을 마무리짖는 올 해도 이 표어를 계속 지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적인 존재들을 찾기 위하여 건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신적인 존재를 찾는 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함께 잃어버린 신적인 존재를 찾아서 떠나십시다. 그들의 손 안에 우리를 위한 귀한 열쇠가 들려져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입다를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십시다. 최고의 해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한 어린이로부터 카드를 받았습니다. 가끔 보스톤에 와서 치료를 받곤하는 어린이인데 올 때마다 엄마와 함께 저희교회를 방문합니다.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저 수진이예요.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가 일어난지 1년이나 되었지만 아직 땅을 파면 기름이 나오고 기름 때문에 죽어가는 동물들도 있어요. 저는 빨리 서해안이 회복이 되어 아름다운 바다를 볼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자기 전 기도를 할 때, “서해안이 빨리 회복을 할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하나님께 이야기해야 겠어요. 건강하시고 Merry Christmas!”
저는 이 편지를 읽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로 인해서 고생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들을 위한 열쇠를 누가 갖고 있나? 바로 혼자서 남몰래 기도드리는 이 수진이가 아닌가?’
늘 병원을 다녀야만 하는 어린이에게 열쇠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를 위한 해결의 열쇠를 가진 자들도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이 아닐까요? 아니 우리들이 그 동안 무시했던 입다가 아닐까요? 압다를 찾아가십시다. 최고의 해를 맞이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2009년도 최고의 해를 맞이 하십시다. 아니 최고의 해를 맞이 하겠다는 결단의 글을 써 놓으십시다. 그리고는 버려진 신적인 존재들을 찾으러 나섭시다. 그들에게 고백하십시다. “당신은 우리들의 장관이 되라.” 최고의 해가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