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8.03.09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므낫세의 눈물
성경본문 : 창세기 48: 8-20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3-9-2008.wmv
유대문학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청년이 영적으로 깊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혼자서 오랫 동안 수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는 랍비를 찾아 갔습니다.
“랍비, 저는 영적인 깊은 세계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무엇으로 증명할 수있지?”
“저는 오랜 시간 저 자신을 여러 각도에서 잘 훈련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저는 하루 종일 금식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남을 위해서 아주 힘든 일도 할수 있구요. 그래도 전혀 감사하다는 말을 기대 안하는 사람이 되었죠. 만일 육체적인 욕구가 생기면 저는 눈 위에서 구르거나 가시덤불 위에서 구릅니다. 밤에 잠자기 전에는 옛날 수도사들처럼 저의 몸에다가 채찍을 가합니다. 저는 저의 몸을 철저히 훈련시켰습니다. 결국 영적으로 깊은 사람이 되었죠. 이제 성자가 된 것 같습니다.”
랍비는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그리고는 청년을 창가로 데리고 가더니 밖에 서 있는 말을 가르킵니다. 그리고는 입을 엽니다.
“나는 저 말을 한동안 관찰해 보고 있었지. 때때로 저 말은 주인에게서 하루종일 물이나 먹이를 받지 못할 때가 있어. 어떤 날은 하루종일 사람들을 위해 일하지 그런데 한번도 감사하다는 말을 듣지도 못해. 자주 저 말은 눈 위를 구르거나 가시덤불 위를 구르지. 또 자주 채찍에 맞어. 내가 하나 물어 볼까? 저 말은 성자일까?”
랍비가 보기에 청년은 결국 말처럼 되어 갔던 것입니다. 사실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청년은 말보다 못한 사람이었다가 겨우 말같은 사람이 된 것뿐인데 자기가 마치 성자가 된 양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 다섯째 주일예배로 드립니다. 우리는 이번 사순절을 잘 보내기 위해서 사순절 묵상집도 만들어서 함께 같은 고백을 하면서 지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경건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40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사순절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의 목표는 말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말보다 못하면 먼저 말처럼 되어야죠. 우리가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만 그런데 그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말처럼 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번 남은 사순절 기간 우리가 어떤 목표를 갖고 사순절을 보내길 원하실까요?
오늘 설교 제목은 ‘므낫세의 눈물’로 정했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요셉의 눈물을 생각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의 눈물을 생각하고저 합니다. 요셉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므낫세가 형이고 에브라임이 동생입니다. 그러면 형인 므낫세는 어떤 눈물을 흘렸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야곱이 나이들어 거의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을 때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이 두 아들과 함께 아버지 야곱을 찾아 왔습니다. 이에 야곱이 요셉에게 말합니다.
“이들은 누구냐?”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그들을 축복하겠다고 합니다.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자녀를 축복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요셉은 기쁘게 자기 자녀들을 할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할아버지 야곱이 나이들어 눈을 거의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요셉은 직접 두 아들을 야곱의 무릅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그리고는 형인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쪽 무릅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동생인 에브라임은 야곱의 왼쪽 무릅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인 야곱이 오른 손으로는 형을 안수하고 왼손으로는 동생을 안수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왼 손잡이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른손이 바로 힘과 권위의 상징이기 때문일줄 압니다. 그런데 야곱이 오른 손을 펴서 앞에 머리숙이고 있는 므낫세 머리에 얹는 것이 아니라 동생 에브라임 머리에 얹습니다. 왼손을 펴서는 형의 머리 므낫세의 머리에 놓습니다. 그리고는 축복합니다. 15, 16절입니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
뒤늦게 요셉이 발견하였습니다. 야곱의 손이 잘못 되어 있습니다. 오른 손이 동생에게 가 있고 왼 손이 형에게 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아버지의 손을 옮기려고 합니다. 이를 거절하면서 아버지가 말합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그러면 므낫세의 입장에서 이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할아버지가 축복을 해주신다고 해서 므낫세는 아버지 요셉이 시키는대로 할아버지의 오른쪽 무릅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할아버지의 오른 손으로 축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아버지 요셉의 뜻이었습니다. 정식으로 장자권이 수여되는 순간입니다. 손이 올라왔습니다. 축복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잠시 후 아버지가 축복을 중지시킵니다. 손이 잘 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른 손이 동생에게 가 있다는 것입니다. 앞이 노래집니다. 행여나 손을 바꾸실까 했는데 야곱은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언합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므낫세는 한 순간에 장자권을 빼앗겼습니다. 므낫세는 아마도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형제지간 사이가 안 좋아지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재산 상속문제라고 합니다. ‘누가 더 부모로부터 많이 갖느냐’가 싸움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형제의 사이가 나뻐지고 서로서로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왜 형제 사이가 나빠집니까? 가장 큰 이유는 시기일줄 압니다. 남이 자기보다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며 시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가 결국 서로의 인생을 망치게 하지 않습니까? 형제를 잃는 것이 바로 인생을 망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므낫세는 단순히 유산을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동생은 여러민족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도 큰 민족을 이루지만 동생의 축복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므낫세도 인간인지라 시기가 하늘끝까지 솟구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안에서 솟구쳐 오른 시기를 이겼는지 아니면 졌는지 성경은 자세히 알려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몇 가지로 추측할수 있습니다.
므낫세의 이야기를 더 생각하기 전에 시기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살펴보면 므낫세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줄을 압니다. 시기에 대해서 가장 잘 표현된 작품중에 하나가 쉐익스피어의 작품 ‘오델로’라고 합니다. 오델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시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먼저 살펴 보고자 합니다.
간단히 오델로 이야기를 요약해 드리면, 오델로는 흑인 장군이었습니다. 그의 부하로 백인인 이야고라는 부하가 있습니다. 이야고는 자기의 상관인 오델로를 무척 시기합니다. 흑인인 주제에 장군입니다. 아울러 자기의 상관입니다. 힘을 사랑한 이야고가 얼마나 배가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오델로가 카씨오라는 군인을 자기의 상관으로 진급시켰습니다. 자기보다 아래이었던 자가 자기의 윗사람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배가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더욱 오델로를 증오합니다. 시기가 증오로 변한 것입니다.
이야고는 복수하기 위하여 오델로의 결혼 생활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장인에게 거짓 소문이 들어가게 하고 심지어 오델로가 자기 부인과 부정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소문을 만들어 냅니다. 한편 오델로에게는 자기(오델로) 부인과 오델로가 진급시킨 카씨오가 불륜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결국 오델로가 자기의 부인을 죽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야고의 장난이었음을 후에 알게 됩니다. 오델로는 자살합니다. 이야고는 붙잡혀서 처형을 당합니다. 서로 서로 죽고 죽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시기하는 이야고에게 오델로가 굴복한 것입니다. 이야고의 시기가 오델로를 이겼습니다. 오델로도 자기처럼 시기하는 사람이 되게하였고 그로 인해 서로 죽이고 자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쉐익스피어는 이 작품을 통하여 인간의 시기가 얼마나 세상을 파괴할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이 작품이 주는 교훈은 내가 시기 안한다고 해서 괜찮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를 시기하는 사람으로 인해 우리도 파괴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기는 시기하는 본인을 파괴시키지만 상대방도 파괴시킨다는 것입니다. 시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줍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시기를 안하는데 이웃이 여러분을 시기하고 계심을 느끼십니까? 조심하십시요. 여러분도 그 시기에 전염될지 모릅니다. 이웃의 시기는 묘하게도 우리의 시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이웃의 시기는 죽었다고 생각했던 우리들의 시기를 살아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므낫세의 삶이 위대하게 보입니다. 므낫세가 만일 시기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도 망치고 에브라임도 망쳤을 것입니다. 여기서 과연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 볼까요?
이스라엘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나뉘어지는데 남왕국은 물론 유다지파가 차지합니다. 유다지파 이외는 없다시피 합니다. 시므온 지파가 끼어 있을 정도입니다. 북왕국에는 나머지 지파가 다 몰려 있습니다. 북왕국을 대표하는 지파가 바로 에브라임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종종 북왕국을 말할 때는 아예 “에브라임아!”라고 말합니다. 이는 “북왕국아!”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에브라임이 강성한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므낫세지파도 꽤 큰 지파가 되었습니다. 에브라임보다는 못하지만…. 곧 므낫세도 잘되고 에브라임은 더 잘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므낫세는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야곱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시기할수 밖에 없는 상황을 잘 극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의 축복대로 에브라임을 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기할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시기하지 않고 원망할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원망하지 않았을까요?
야곱의 왼손이 자기 머리 위에 얹어진것을 알았을 때 므낫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을줄 압니다. ‘시기냐 눈물이냐.’ 그 상황에서 그는 눈물을 택한 것입니다. 눈물이 시기를 이긴 것입니다. 눈물로 인해서 시기는 녹아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눈물로 인해서 시기는 씻겨 내려가 버렸습니다. 시기는 서로서로를 죽이는 것이지만 눈물은 서로서로를 살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므낫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만일 므낫세가 눈물 대신 시기를 택했더라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이 존재할수 있었을까요? 결국 이스라엘하면 제일 눈에 띄는 지파가 유다지파이고 에브라임지파인데 이들은 눈에만 띄는 지파이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되게 한 사람은 바로 므낫세일줄로 압니다. 백번 시기할수 있는데 그는 눈물을 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살리고 온 이스라엘을 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므낫세의 위대함을 밝히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도 이번 사순절을 맞아 창세기에 나타난 인물들의 눈물을 살펴보면서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되게 한 것은 바로 므낫세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면 므낫세의 눈물은 어떤 눈물일까요? 좌절의 눈물이었을까요? 버림 받은 자의 슬픔의 눈물이었을까요? 좌절의 눈물 슬픔의 눈물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눈물이 되었을까요? 물론 처음에는 좌절의 눈물 슬픔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눈물을 넘은 새로운 눈물을 그는 소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안에 숨어 있는 시기라는 괴물을 난생 처음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자신 안에 있는 그 괴물로 인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이 그 괴물을 잡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성경 여기저기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에서와 야곱의 관계입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빼앗기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동생 야곱에게 빼앗기자 야곱을 죽이려 합니다. 결국 야곱은 집을 떠나 도망갑니다. 에서는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어머니 리브가의 근심거리가 됩니다. 야곱은 다행히 작년에 말씀드린 대로 예배하는 나그네가 되었기에 그나마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형을 잃은 삶을 살아 갑니다. 에서의 시기가 가정을 망친 것입니다. 에서의 시기가 자신을 망쳤고 동생인 야곱을 젊은 나이에 남의 집에서 15년을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동생을 잃은 것입니다. 반면 에서가 장자권을 빼앗겼을 때 눈물을 흘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 안에 있는 시기라는 괴물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에서는 시기라는 괴물에게 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시기라는 괴물은 우리를 망치게 하고 이웃을 망치게 합니다. 눈물만이 이 괴물을 잡을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이러한 눈물을 흘리는 절기입니다.
삼성회사 중역으로 일하시고 계신 분이 “눈물이 필요한 때”라는 글을 쓰셨습니다. 그 글을 일고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삼성전자가 해외에 공장을 설립할 때 일이었습니다. 독일 영국 스페인을 투자대상으로 검토했고 최종적으로는 영국의 스코틀랜드와 노던 잉글랜드를 경쟁시켰다고 합니다. 두 지역이 치열하게 유치 경쟁을 하였다고 합니다. 모든 협상을 마치고 노던 잉글랜드의 윈야드를 떠날 때였습니다. 배웅 나온 고위 공무원이 후보지 중 어디로 정했느냐 물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아직 확정되지 못했다는 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고위 공무원은 눈물을 글썽였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진정한 눈물이었다. 진심으로 나라와 지역을 생각하는 영국 공무원의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지금까지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우리 나라에도 저런 공무원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결국 노던 잉글런드 윈야드에 공장을 설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위 공무원의 진정한 눈물은 자신을 살렸고 지역을 살렸고 나라를 살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눈물의 위력을 볼수 있습니다. 인간의 눈물이 인간의 마음을 이처럼 움직이는데 하물며 우리들의 눈물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특히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보며 흐느낄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우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사순절은 참된 눈물을 회복하는 절기입니다. 그 동안 ‘시기냐 눈물이냐?’의 싸움에서 우리가 어디를 선택하였는지 살펴보고 참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아니 혹시 그 동안 거짓눈물을 흘리지 않았는지, 슬픔과 좌절의 눈물만을 흘리지 않았는지 자신을 살펴보고 참 눈물을 회복하는 절기입니다.
참 눈물은 자신의 죄를 정결케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정욕과 시기와 질투를 이깁니다. 이 눈물은 믿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 눈물은 우리를 일으켜 줍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세상을 바로 보게 합니다.
이 눈물을 소유한 자는 자기의 동생이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축복을 받아도 감사하는 자가 됩니다. 왜? 이들은 눈물 가운데서 하나님,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이웃이 시기를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웃의 시기의 피해자가 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기를 시기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눈물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참으로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읍니다. 방사능이 있는 곳에 위험이란 싸인을 붙이는데 지금 우리 세상에 “Danger(위험)”라는 싸인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처럼 남과 비교하면서사는 세상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이웃과 비교하면서 사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A,B,C,D로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시가가 정당화되어 있습니다. 곧 시기가 하나의 문화가 되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시기가 우리의 삶의 안내자가 되어 있습니다. 시기가 가라는데로 끌려 다니면서 살고 있습니다. 시기의 안내를 받아서 이 세상에서 잘 되어 갔다고 가정하십시다. 세상적으로 잘 되기만 하면 어느덧 이웃이 시기하는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가 우리를 해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안팎으로 시기로 둘려 싸여져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므낫세의 눈물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순절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가 참 눈물을 회복할 때 우리도 잘되고 우리의 이웃도, 우리를 시기하는 자들도 잘될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누구가 성자입니까? 므낫세의 눈물을 흘리는 자가 아닐까요?
말씀을 거둡니다.
그 동안 많은 성자라고 불리우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중에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성자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아씨씨의 성프란시스일줄 압니다. 새들과 대화하고 여우들과 장난을 하였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나이들어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의 진단은 바로 눈물을 많이 흘렸기에 눈이 멀게 되었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눈물을 흘리는 분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는 분이었습니다. 이웃이 잘못을 행할 때 이웃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분이었습니다. 세상이 잘 못 돌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눈물을 흘리는 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분이었습니다. 그의 눈물 안에서 하나님과 온 이웃과 온 자연세계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의 눈물 안에 천국이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은 사순절 기간 므낫세의 눈물에 동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응답 안하실 때 눈물을 흘리십시다. 내 안에 시기가 솟구쳐 오를 때 눈물을 흘리십시다. 이웃이 우리를 향하여 시기질투할 때 눈물을 흘리십시다. 끝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십시다. 우리들의 눈물 안에 천국이 자라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