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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의 기다림

날짜 : 2007.12.1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40년의 기다림
성경본문 : 요한복음 5:1-9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web_12_16_2007.wmv

파울라 달씨(Paula Darcy)라는 분이 대강절묵상집을 펴냈습니다. 그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나옵니다. 하루는 꽃가게에 가서 화분을 샀습니다. 화분이라기보다는 돌로 만든 장식용 화분입니다. 꽃 보다는 돌이 더 멋있어 보였습니다. 하여튼 돌 가운데는 움푹 파여 있고 파여 있는 데에 흙이 있고 그 안에 예쁜 화초가 심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늦은 가을에 여행을 다녀 오니 화초가 죽어 있었습니다. 아주 예민한 화초였나 봅니다. 겨울을 그냥 지내고 봄이 왔습니다. 그 돌화분에 다른 화초를 사다 심겠다는 마음으로 꽃가게에 갔습니다. 그런데 화초 대신에 새 화분을 사 왔습니다. 천정에 매어 달아 거는 화분이었습니다. 한편 돌화분은 장식용으로 천정에 매어 단 새로 사온 화분 아래 놓았습니다. 어느 여름날 화초에 물을 주는데 돌화분에 잡초가 자라는 것이 보였습니다. 사실 돌화분에는 약간의 흙이 담겨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왕 자라고 있으니 잡초라도 뽑아 버릴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도리어 잡초라도 예뻐 보였습니다. 그래서 돌화분에도 물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며칠이 지나니 흙이 별로 없는 돌화분이지만 그 잡초에 꽃이 피었습니다. 천정에 매단 화분에 있는 꽃과 똑 같은 꽃이 피었습니다. 어느새 씨앗이 돌화분에 떨어졌고 싹이 난 후 꽃이 핀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고 파울라 달씨는 씨앗의 신비함을 묵상하는 글을 쓴 것입니다.

저도 이 글을 읽고 씨앗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가지 씨앗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씨앗은 흙이 많은 화분에 떨어졌습니다. 또 한 씨앗은 흙이 거의 없는 돌화분에 떨어졌습니다. 어느 화분에서 꽃이 더 활짝 피겠습니까? 물론 흙이 많은 화분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 예수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생각납니다만, 그런데 이 시간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는 다른 새로운 각도에서 씨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새로운 각도에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자, 같은 씨가 하나는 흙이 많은 화분에 떨어졌고, 또 하나는 돌화분에 떨어 졌습니다. 결과는 판이합니다. 그러나 대강절은 결과를 보는 계절이 아닙니다. 대강절은 씨앗을 보는 계절입니다. 씨앗이 소유하고 있는 꿈을 보는 계절입니다. 요즘은 결과를 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대강절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하여튼 흙이 많은 화분에 떨어진 씨앗이 더 큰 꿈을 소유한 씨앗이었을까요? 돌화분에 떨어진 씨앗은 작은 꿈을 소유한 씨앗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 돌아 갑니다. 씨앗이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작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옥토에 뿌려졌는데 이 네 가지 씨앗이 각자가 소유한 꿈이 다르기에 네군데 다르게 떨어졌나요? 큰 꿈을 소유한 씨는 옥토에, 더 작은 꿈을 소유한 씨는 가시덤불에, 더 작은 꿈을 소유한 씨는 돌작밭에, 그리고 길가에 떨어졌나요?

씨가 주는 놀라운 교훈이 있습니다. 씨는 어디에 떨어지던 똑 같은 꿈을 소유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안고 최선의 삶을 삽니다. 환경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지는 것뿐입니다. 환경이 좋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나쁘면 적게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씨앗이 갖고 있는 꿈은 어디에 떨어지나 똑같습니다. 반면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환경에 따라서 우리의 꿈이 변하지 않습니까?

사실 대강절은 우리가 어디에 떨어졌느냐를 생각하는 계절이 아닙니다. 어디에 떨어져 있던 그 꿈을 잃지 않고 살고 있느냐를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환경으로 인해 우리들의 꿈은 변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씨앗들처럼 어디에 떨어져도 늘 똑 같은 꿈을 소유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참된 꿈을 가진 자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자신의 꿈이 38년간 변하지 않은 한 사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기가 처한 환경에 관계 없이 꿈을 잃지 않았던 분입니다. 그분의 삶을 생각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이 되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그 못은 특별한 못이었습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는 못이었습니다.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못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오랫만에 예루살렘에 올라 온 차라 베데스다 못을 들러 보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38년된 걷지 못하는 병자가 자리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거의 40년 병들어 고생한 사람입니다. 이 분의 병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수는 없지만 걷지 못하는 것을 보아서 많은 분들이 중풍병자가 아닌가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장 확실한 것은 날 때부터 걷지 못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분의 나이는 못해도 60은 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60이라고 생각하면 20살에 걷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적게 잡아도 60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60은 노인이란 말을 안 합니다만 이 당시는 60이면 당연히 장수한 노인이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60난 노인이 누워 있는 것을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6절에 기록되기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 말씀을 통해서 알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병자가 너무 오래 누워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깊은 연민에 사로 잡히신 것 같습니다.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는 “Yes”라는 대답 대신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것이 예수님에게는 “Yes”로 들렸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갑니다.

그는 38년간 아니 편이상 40년이라고 하겠습니다. 40년간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을 이루게 됩니다. 물론 자기가 생각했던 방법대로 이루워지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소원을 이룹니다. 40년만에…. 병자는 40년만에 평생에 기다리던 소원을 이룹니다. 그는 40년간 대강절을 지킨 것이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것을 이루고 만것입니다.

티모시 도란(Timothy Dolan)이라는 분이 대강절에 대해서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내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깨닫는 것은 인생은 대강절이다.” 곧 ‘인생은 기다림 투성이다’라는 말일줄 압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듭니다.

‘환자는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은 후 기다린다 암인지 아닌지, 이것도 대강절의 기다림이다. 학생은 학교에 입학 원서를 써 놓고 기다린다 과연 입학이 되는지 안되는지, 이것도 대강절의 기다림. 우리의 자녀가 의식을 잃고 병실에 누워 있을 때 우리는 기다린다 아이가 깨어날까 안 깨어날까, 이것도 대강절의 기다림. 이락에 자녀를 보낸 부모들은 기다린다 자녀가 건강히 돌아 올 것인가, 이것도 대강절의 기다림. 신부는 성례전을 통하여 교인들이 변화되길 바란다, 이것도 대강절의 기다림. 아내이던 남편이던 부부싸움 후 문을 쾅 닫고 나간 배우자를 생각하며 문을 바라보며 기다린다, 이것도 대강절의 기다림. 불경기에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헤멘다, 이것도 대강절의 기다림. 오늘은 술을 안 마시고 이 밤을 넘길수 있을까? 술을 끊은지 3개월. 이것도 대강절의 기다림.’

이 분의 글을 읽고 나니 정말 인생은 기다림임을 아니 대강절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아울러 이해되는 것은 왜 예수님께서 이분을 40년만에 고쳐 주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인생은 어짜피 대강절, 기다림의 레파토리가 바뀌어진다뿐이지 인생은 언제나 기다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병자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이 분은 40년간 한 가지만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기다림의 대상이 늘 바뀌어 지고 있다는 점이 차이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 병자가 더 위대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생은 어짜피 기다림이니 인생에겐 언제나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다림이 쉬워 보입니까? 40년간 한가지를 기다리는 삶, 아니면 매년 기다림의 제목이 달라지는 삶? 당연히 매년 달라지는 삶이 훨씬 쉽습니다. 일년에 하나씩 제목이 달라진다면 해볼만 합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일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갑니까? 그런데 40년을 한 가지를 기다렸다는 것은 놀라운 사람입니다. 놀라운 삶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 주위에 한 가지를 가지고 오래 기다리고 계신 사람이 있습니까? 그 분을 존경하십시요.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40년만에 이 병자를 찾아 오셨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분안에 있는 기다림을 온 세상에 높이시기 위하여 늦게 찾아 오신 것 같습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예수님은 인생은 기다림인데 가장 값진 기다림의 삶을 산 사람으로 이 분을 높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40년간 매일 같이 베데스다못에 찾아 온다는 것 쉬운 일입니까? 40년간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별일을 다 겪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간 발의 차로 기회를 놓칩니다. 어떤 때는 오늘 처음 온 사람이 먼저 뛰어 들어 기적을 빼앗아 갑니다. 세월이 지날 수록 몸은 더욱 쇠약해집니다. 처음에 왔을 때보다 갈수록 몸 동작이 늦어집니다. 처음에는 간발의 차이로 놓쳤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차이가 심해 집니다. 도저히 제일 먼저 뛰어든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수 없습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언젠가 내가 제일 먼저 뛰어 들겠지’ 생각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놀려주기 시작합니다. “그만 포기해.” 자기를 늘 연못에 데려다 주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포기하라고 하며 더 이상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는 매일 아침 일어 날 때마다 생각합니다. “오늘일거야, 오늘일거야.”

아니 어쩌면 자신의 머리로도 수백번 포기하고픈 생각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만 뜨면 또다시 떠 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오늘일거야 오늘일거야.” 자신도 그 생각이 어디서 오는지 알수 없습니다. 또 다시 갖은 모욕을 무릅쓰고 연못으로 향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기 40년 정확히는 38년 드디어 “오늘일꺼야”가 들어 맞는 날이 온 것입니다.

한 청년이 나타나서 묻습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병자는 “옳다. 이 젊은이가 나를 못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줄수 있겠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에게 말합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병자는 아마도 청년이 이렇게 대답하길 기다렸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번쩍 들어서 못에 넣어주겠오?” 그런데 왠걸 청년은 말합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병자는 어찌된 영문인지 모릅니다. 자기도 모르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자리를 들고 걸어 갔습니다. 병자는 38년만에 걷게 된 것입니다. 38년만에 걷게 되었으니 정신이 있겠습니까? 그 청년이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걸었습니다. 정신 없이 걸었습니다.

이 분이 만일 기다림을 포기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다시 걷기는 커녕 벌써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환경이 여의치 않으면 기다림을 포기합니다. 1년 5년 기껏 가야 10년이면 끝입니다. 그런데 이 병자는 10년이 지나 20년, 30년 40년을 기다렸습니다. 40년 동안 그의 가슴에 있는 기다림의 씨앗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집 피아노위에는 한 장식품이 놓여져 있습니다. 예쁜 병에 담긴 겨자씨가 놓여져 있습니다. 사실 5-6년전 작고하신 조남철 장로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입니다. 5-6년간 겨자씨가 작은 병에 담겨진 채로 말없이 피아노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이 번 설교 준비를 하면서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5-6년전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 불평없이 사이좋게 병 안에서 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번 대강절 설교 준비를 하면서 새로운 눈으로 볼수 있었습니다. 작은 씨지만 하나 같이 똑같은 꿈을 안고 놀고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디에 떨어져도 이 겨자씨들은 아무 불평없이 떨어진 곳에서 최선을 다해 자기의 꿈을 펼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제가 선물 받은 이 겨자씨는 예쁜 병에 담겨 진채 한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100년이라면 100년이라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이 환자에게도 이러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100년이라도 기다리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기다림을 보신 것입니다. 그 기다림의 마음이 있는 병자를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는냐?”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심은 실로 온 인류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온 인류를 향하여 이 병자 안에 있는 기다림을 보게 하시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이 있는 자에게는 놀라운 기적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주시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어떤 분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그래도 40년간의 기다림인데, 아니 100년간의 기다림과 버금가는 기다림인데, 그 기다림에 비해서 나타난 기적은 너무 작지 않습니까?”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40년간의 기다림을 통해서 기껏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적, 귀하긴 귀해도 별로 부러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수 백명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그런 것 보다는 매해 조금씩 기다림의 제목이 달라져도 짧게 짧게 기다리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들의 실용주의적인 사고에서 나온 생각이 아닐까요?

오늘 시간 관계상 본문 말씀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1절에서 47절 까지 잡아야 합니다. 1절에서 9절 까지의 사건을 가지고 신학적인 해석을 한 것이 10절에서 47절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5장의 숨은 주제는 영생입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을 선교단체에서 구원의 확신을 위한 귀절로 많이 사용합니다만 5장은 구원의 확신만을 강조하는 장이 아닙니다. 도리어 5장 전체는 기다림과 영생과의 깊은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 영생은 기다림과 뗄레야 뗄수 없습니다. 이를 증명하기란 아주 쉽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누구의 기다림이 필요했습니까? 하나님의 기다림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영생이 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다림으로 인해 우리에게 영생이 임한 것을 모두 인정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기자는 지금 영생을 논하면서 누구의 기다림을 소개하고 있습니까? 달리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기다림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다림도 영생의 삶에 어떤 공헌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을 우리들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 더 나아가서 하늘나라의 삶에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기다림의 삶을 살게하시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삶을 대강절의 삶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한 시도 기다림과 관련없이 사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기다림을 통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를 펼쳐 가십니다. 영원한 세계를 펼쳐 가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림과 인간의 기다림이 만나는 곳에 영원한 세계는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젠가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세운 업적보다 우리의 기다림의 시간들이 훨씬 많은 영향을 하늘나라에 미친 것을 알게 될 줄 압니다.

다음의 이야기는 기다림과는 직접 관련은 없지만 우리의 삶이 얼마나 하늘나라의 삶과 연관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Gillilan이란 분이 지은 이야기입니다.

딸을 잃은 아빠가 있었습니다. 딸을 잃고 절망에 빠집니다.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하늘나라에 도착했습니다. 아이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행진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모두 촛불이 켜져 있는데 한 아이만 초가 꺼진채 초를 들고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달려 갔는데 가까이 가보니 자기 딸이었습니다. “얘야, 왜 너의 초는 꺼져 있니?” 딸이 말합니다. “계속 킬 때마다 금방 꺼져요?” “왜” “아빠가 땅에서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아빠의 눈물이 하늘나라의 불을 끄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빠의 눈물이 하늘나라의 촛불을 끈다면 아빠의 기다림은 더욱 엄청난 힘이 있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씨앗의 기다림은 이 땅위에서만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기다림은 영원한 세상에게까지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40년만에 그 병자에게 찾아 간 것입니다. 그의 기다림은 전혀 헛된 기다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이 땅위에서의 기적만을 산출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기다림으로 인해 온 세상이 부유해졌습니다. 하늘나라가 부유해졌습니다. 저는 상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 분은 하늘나라에 가서 자신의 40년의 기다림으로 인해 일어난 놀라운 세계를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께 말했을 것입니다.

“저를 찾아 오신 것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10년 후에 저를 찾아 오시지, 왜 일찍 오셨어요.”

말씀을 거둡니다.

지난 목요일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집에서 설교준비를 하고 있는데 눈은 계속 많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집사람은 외출중이었습니다. 걱정이 되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물론 셀폰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회로가 busy해서 다음에 걸라는 메세지를 받았습니다. 전화걸지 말라는 뜻인가 보다 하고 잠시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걱정이 됩니다. 행여나 하고 다시 걸었습니다. 이번에는 집사람이 받았습니다.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했으니 빨리 오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집으로 향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곧 돌아 오려니 하고 다시 설교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안오는 것입니다. 자꾸 창밖을 내다 봅니다. 저는 혼자 망설였습니다.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까 말까 기다릴까 말까. 저는 최소한 지금 어디에 왔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쓸데 없이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까?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Needham쯤 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20-30분간 밖을 내다보며 초조히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순간 기다림의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다시 마음 놓고 설교준비에 들어 갔습니다. 저의 이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다림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기다림의 고통이 싫어서 전화를 건 저의 모습을 느껴 보았습니다.

요즘 현대 문명은 이처럼 기다림의 고통을 우리들에게서 빼앗가 갑니다. 그러면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기다림으로 인해 세워지는 인한 놀라운 세계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늘나라로 연결되는 축복의 세계를 잃어 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현대문명이 앗아 갈수 없는 한가지 기다림이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40년간 육신적인 치유를 위한 기다림을 이렇게 귀하게 사용하셨는데 주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삶은 얼마나 귀하게 사용하실까요?

교우 여러분, 현대 문명이 우리에게서 기다림을 앗아 갈 때마다 우리는 그 자리를 주님의 기다리는 시간으로 채워가십시다.

우리들의 작은 힘으로 일을 저지르지 맙시다. 우리들의 힘보다 더 큰 힘은 우리들의 기다림의 힘입니다. 우리들의 기다림은 온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세상까지 미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리십시다. 우리들의 기다림이 채워졌을 때 기적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다림이 채워졌을 때 영광의 주님은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가슴안에 있는 우리들의 씨앗입니다. 참된 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힘으로 일을 저지르지 맙시다. 기다리십시다. 우리들의 기다림이 채워졌을 때 기적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다림이 채워졌을 때 영광의 주님은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가슴 안에 있는 찬된 꿈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의 고통을 기쁘게 받아드리십시다. 현대문명으로 없어진 기다림의 자리를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채우십시다. 두 주전 말씀드린 것처럼 시시때때로 구름을 바라보십시다. “저 구름을 타고 오실까? 주님께서 타고 오실 구름은 어떤 모양일까? “ 이처럼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림의 고통 가운데 있는자들에게 주님은 기적의 선물을 안고 어느날 찾아 와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네 기다림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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