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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간 해 그림자

날짜 : 2007.09.2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물러간 해 그림자
성경본문 : 열왕기하 20장 1절-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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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이 많이 드신 신사가 큰 도시에서 골동품(antique)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한 여행객이 그 상점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물건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가게 주인에게 묻습니다.

“이 가게 안에 있는 상품 중에 가장 진기한 것이 어느 것입니까?”

곧 가장 신기하고 신비스러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아마도 여행객은 이것저것 자신이 직접 살펴보는 것보다는 가게 주인께 물어 보는 것이 빠르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가게 주인은 가게 안에 진열된 여러가지 물건을 한번 쭉 살펴 봅니다. 많은 골동품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사슴 머리를 비롯해 새와 여러 동물들이 박재가 되어 있는 것들을 봅니다. 또한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것들도 눈에 띕니다. 한참 살펴보더니 말합니다.

“ 이 가게 안에서 가장 진기한 물건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저’ 자신입니다.”

노인은 담대하게 자신의 진기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소개해 드릴까요?

한 선생님이 현대 발명품에 대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합니다.

“50년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중요한 것이 어떤 것들이 있죠?”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5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대답합니다.

“저요!”

아마 선생님은 학생들이 컴퓨터라고 대답하길 기다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똑똑한 학생의 대답은 “접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노인이 주인공이었고 두 번째 이야기는 어린이가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똑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소중함을 깊게 깨닫고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 두 사람과 같이 자신의 소중함을 안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아니 크리스챤들은 자신의 소중함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깐. 하나님의 자녀만큼 이 세상에서 진기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에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과거 50년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중요한 것이 어떤 것들이 있죠?’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Me”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물론 저도 50이 넘었으니 50이 넘으신 분들에게는 100년 전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죠. 우리는 모두 머릿속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정말로 진기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인 히스기야왕도 자신의 진기함을 잘 모르며 지냈던 사람 같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자신의 진기함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그의 삶에 한 위기를 주신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왕은 다윗에 이어서 남왕국의 13대왕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물게 하나님께 칭찬받은 왕중에 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낫게 되는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죽을 것을 선포하십니다. 1절 말씀 하반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물론 히스기야는 기도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그런데 기도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보통 죽게 되었으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합니까? 그동안에 지었던 죄라는 죄는 다 들추어내서 회개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히스기야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도 없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선행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화가 나야하지 않았을까요? 4절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 곧 히스기야의 죽음을 선고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금방 하나님의 음성이 이사야에게 임한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왕이라는 작자가 병이 걸려 죽게 되었는데 회개는 안하고 도리어 자신의 선행을 살펴 달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화가 나지 않을수 밖에…. 5절 말씀입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뜻밖입니다. 회개의 기도는 눈꼽만도 안하는 히스기야에게 놀라운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받은 것입니다. 결코 회개의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3일만에 다시 하나님 전으로 들어 가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6절 말씀입니다.

“내가 네 날을 십 오년을 더할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두 가지 약속을 더 말씀하십니다. ‘네 날을 십오년 더할 것이요.’ 그냥 낫게 하는 것뿐이 아니라 15년 더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이 당시 몇 살이었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하여튼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15년 더 살게 된 것은 부활을 경험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두 번째 약속은 예루살렘성을 그 당시 강대국인 앗수르에게서 보호해주신다는 약속까지 받습니다. 이것은 복위에 복입니다. 장수의 축복과 함께 예루살렘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나머지 말씀은 잠시 후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까지의 말씀을 생각하면 한가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왜 병들게 하셨는가? 분명한 것은 그의 죄를 해결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죄에 대한 회개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병을 낫게 하셨고 또 15년 더 생명을 연장시키셨고 그위에 예루살렘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니 히스기야의 죄 때문에 병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 때문에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고 싶으셨는데 히스기야의 기도가 필요해서 기도하게 하시려고 그에게 병을 주셨을까요? 그것도 전혀 무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 전의 말씀들을 시간상 간단히 요약해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전의 내용은 이미 앗수르에게서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병들기 전에 먼저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그럴때 이미 히스기야는 눈물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19장 20절 말씀을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까닭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병들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셔서 앗수르에게서 구원해 주는 놀라운 체험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기도의 응답을 이미 받았던 자입니다. 자신의 눈물의 기도로 인해서 앗수르를 하나님께서 물리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인지 히스기야가 병들었습니다. 이사야가 병을 고쳐줍니다. 8절 말씀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조가 있나이까.”

이미 병은 나았지만 히스기야는 좀 믿기 어려운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것은 쉽게 믿어도 병 고침 받는 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는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한 징조를 구합니다. 이에 이사야가 해 그림자의 해 시계가 십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길 원하는지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길 원하는지 택하라고 합니다. 이에 히스기야가 대답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물러갈 것이니이다.”

히스기야도 상당히 약은 사람입니다. 해가 앞으로 기울게 되어 있으니 뒤로 기울게 하여 달라고 말합니다. 이에 히스기야의 소원대로 해의 그림자가 십도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

자 그러면 우리들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병들게 하셨을까요?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려고…? 그것은 아닙니다. 이미 히스기야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었습니다. 앗수르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이루기 위해 태양까지도 거꾸로 움직이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시기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는 해시계가 십도 뒤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자기의 병이 낫는 것보다도 예루살렘이 앗수르에게서 보호받는 것보다도 더 큰 감격을 안고 그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등골이 오싹하는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을 안고 해가 뒤로 물러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의 기도가 태양을 온 우주를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며 감격의 눈물을 흐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온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여주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한가지 더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왜 히스기야에게 태양도 움직일 수 있음을 주셨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바로 히스기야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히스기야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가 바로 우리가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물의 기도는 온 우주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확신을 갖고 살 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아니 달리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깨달음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이러한 깨달음을 갖고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분들의 삶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커네티컷의 어느 양로원에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습니다. 양로원 노인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한 그룹은 음식을 고르는데 자유를 주었습니다. 또 다른 그룹은 자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A그룹은 아침식사를 오므렛이나 계란 후라이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였습니다. 한편 B 그룹은 정해진 음식만 주었습니다. 또 A그룹은 영화를 보기 원하는 날을 노인들에게 고르게 했습니다. B그룹은 정한 날에 영화를 보게 하였습니다. 또 A 그룹은 침대 옆 화초의 위치를 노인들에게 정하게 하였습니다. B그룹은 일방적으로 정해주었습니다.

3주일이 지나서 A그룹 사람들이 더 건강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18개월 후에 보니 A그룹 노인들보다 B그룹 노인들이 두 배로 많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실험자들이 내린 결론은 환경에 대한 영향력이 사람을 더욱 건강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을 누리는 자들이 오래 살고 환경에 매어있는 자들이 오래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노인들이 자신이 음식선정과 화초위치 선정만을 하는 힘만 갖고 있어도 그토록 삶이 변하는데 자신의 기도로 태양이 움직인다는 생각을 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삶을 살겠습니까? 아니 이런 깨닮음을 가졌던 히스기야가 얼마나 놀라운 삶을 살았겠습니까?

사람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 때 사람은 더욱 건강하게 아니 인간답게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마음대로 할수있는 영역이 넓으면 넓을수록 더 자신있게 살아 갈 것입니다.

저희 집사람이 집을 비울 때면 저에게 여러가지 숙제를 써놓고 떠납니다. 그 중 하나가 화초에 물을 주는 것입니다. 어느 화초는 어떻게 주어야하고, 어느 화초는 1주일에 한번만 주어야 하고, 어느 화초는 2-3일에 한번씩 물을 주어야 하고… 화초에 물을 주면서 혼자 생각해 봅니다. 내가 만일 물을 안 주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내가 만일 물을 너무 많이 주면 어떻게 될까? 나의 손에 화초의 생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더 조심스럽게 화초를 대하게 됩니다. 물론 자긍심도 생기고요.

저희 교우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농사를 짓습니다. 농사짓는 분들은 여러모로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로는 무공해 농작물을 드시니 좋고, 또 경제적으로도 좋고, 또 이웃에게 나누어 주며 사랑을 베푸니 좋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마음대로 농작물을 가꾸니 좋고…. 건강에도 좋을뿐더러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자신의 특권을 누리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자라나는 농작물을 보면서 자신의 소중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히스기야는 태양까지 움직였습니다. 사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태양의 위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태양신까지 생겨난 것 아니겠습니까? 태양은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움직였습니다. 히스기야도 화초에 물을 주곤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누리곤 하였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것만으로 만족하였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태양을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후로 히스기야는 종종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태양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욱 멋진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살수 있는 최고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어떠한 역경이 와도 태양을 움직인 자신의 기도를 생각하며 승리의 눈물의 기도를 올리곤 하였을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15년 더 생명을 연장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주위환경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훨씬 더 건강하게 살수 있으니 말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태양까지 움직일 수 있는 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5년 더 사는 것은 당연지사일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15년 더 살게 하시려고 어쩌면 히스기야에게 태양을 움직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히스기야는 그 누군가가 “지난 백년간 이 땅 위에서 제일 진기한 존재가 무엇입니까?” 묻는다면, 그는 대답했을 것입니다. “접니다!”

교우 여러분, 히스기야는 진기한 사람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태양을 움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진기하다면 바로 우리도 진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태양을 움직일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도 태양을 움직이면서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많다고 생각 할수록 우리의 삶은 움직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태양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것도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가장 축복된 삶을 누리는 겁니다.

오늘 은혜마을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그동안 은혜마을 교우분들 교회 구석 구석에서 많은 수고를 하신 것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숨어서 하시는 일들 중에 많은 일들을 은혜마을 교우분들이 하시고 계심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헌신예배를 여러분들이 그 동안 수고하신 것으로 인해서 칭찬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그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은 없는 줄 압니다. 도리어 더욱 잘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계실 줄 압니다.

여러분들은 주어진 일을 너무나 잘 감당하셨습니다. 화초도 잘 가꾸셨고 교회 청소도 잘하셨고 여러 모양으로 주님을 잘 섬기셨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에게 오늘 주님은 새로운 것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감히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심지어 태양까지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것까지 믿을 때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은혜마을 교우 여러분

우리 함께 서로를 세워 가십시다. 서로서로 태양도 움직일수 있는 자임을 믿고 함께 믿음의 분량을 키워 가십시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이 땅에서 삶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 갈 것입니다. 그 만큼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우리 함께 진기한 존재가 되어 가십니다. 우리는 태양도 움직일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 시간 그 동안 여러분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그것도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 이제는 온 우주가 십자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은 온 우주가 십자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 인데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온 우주가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모든 것은 움직여 질수 있음을 믿으십시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의 헌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교우 여러분,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깃털과 같습니다. 쉽게 움직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안 움직여졌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움직이리라 믿지 않았기 때문일 줄 압니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금 이미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느 제자가 수도승을 찾아 와서 말합니다.

“스승님 저는 저의 능력 안에서 세운 작은 규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조금 기도도 하고요 금식도 약간 합니다. 명상도 좀 하고요. 저는 제 능력 안에서 저의 마음을 늘 정결케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더 해야 할까요?”

스승님은 일어나더니 손을 하늘로 뻗치며 열 손가락을 펴고 말합니다. “이 열 손가락이 완전히 불로 변하였노라.”

스승님은 기도로 인해 불로 변한 손을 소유하고 있음을 제자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손은 화초를 가꾸기도 합니다. 농작물을 재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다. 주님은 우리의 손이 기도를 통하여 불로 변하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태양을 움직이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손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피땀 흘리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손은 그로 인해 가장 움직일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까지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손이 되었습니다. 이 것을 믿을 때 우리의 참 헌신은 시작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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