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7.09.1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더욱 의지한 사람
성경본문 : 사무엘 상 30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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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어느 작은 마을에 다람쥐가 들끓었습니다. 다람쥐들은 한적한 교회당들을 좋아했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당이 있었는데 세 교회당을 점거하였습니다. 전선을 끊기도하고 여기 저기 기둥을 파내려 갔습니다. 세 교회는 참다 못해 각기 이를 대처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습니다.
먼저 장로교가 회의를 열었습니다. 교리를 잘 아는 장로님이 일어나더니 의견을 피력합니다. “우리는 어쩔수 없습니다. 다람쥐들이 우리교회에 들어 온 것은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리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도 계실텐데 장로교의 기본 교리 중에 하나가 예정설입니다. 이 장로님은 자기 마음대로 예정설을 여기에다가 갖다 붙혔습니다. 교리 앞에 다른 분들은 함구무언이었습니다. 그대로 두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감리교회가 회의를 열었습니다. 한 여성성도가 일어나더니 교인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인 John Wesley의 사랑의 원칙대로 이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교우님들은 그 의견에 모두 동조하였습니다. 다람쥐들을 상하지 않게 잡는 덫을 사왔습니다. 다람쥐들을 잡아서 멀리 마을 바깥에 놓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와 보니 다람쥐들이 다시 몰려 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당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쉽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신부님이 다람쥐들을 세례를 주었습니다. 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 후 다람쥐들은 일년에 세번 교회에 왔다고 합니다. 세 번이 언제일까요? 부활절, 감사절, 성탄절.
아마도 일년에 세 주일만 교인들로 꽉 채워지는 교회를 보면서 어느 미국 교회 성직자가 만들어 낸 농담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 많은 미국교회 목사님들은 통쾌한 생각이 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처럼 한인교회 목사들은 웃음은 나오지만 미국교회 목사님들과 같은 통쾌한 느낌까지는 들지 않습니다. 그저 ‘놀라운 지혜로 미국교회의 현실을 잘 풍자했구나’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한인교회 목사들에게 이 이야기는 다른 면에서 많은 도전을 줍니다. 저자의 의도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이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 드린다면 장로교는 교리가 우상이 되어있는 듯 보입니다. 예정설이라는 교리 앞에 모두 함구무언이 되었습니다. 감리교는 방법이 우상이 되어있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Methodist(방법론자)들이 된 것입니다. 창시자 웨슬리의 방법 앞에 모두 함구무언이 되었습니다. 반면 천주교는 예식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예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물론 교회는 교리도 중요하고 방법도 중요하고 예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리와 방법과 예식보다 앞서가는 그 무엇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없을 때 이 세가지도 무용해지는 그 무엇이 있지 않겠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저희교회는 교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로교입니다. 한편 정치체제가 잘 되어 있습니다. 장로교의 정치체제를 통해서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가 기반을 닦아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리보다 정치체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제직 안수 임직예배로 드립니다. 오늘 여러분이 장로교 안수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안수 임직을 받습니다. 교리 이전에 임직자로서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상고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의 주인공은 장로교와도 상관없고 감리교나 천주교와도 상관이 없는 아니 장로교 감리교 천주교라는 말도 모르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사울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아직은 사울도 살아 있을 때입니다. 이 당시 다윗에게는 여러 적이 있었습니다. 첫번째가 사울왕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피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말렉 사람들도 다윗의 적이었습니다. 한편 묘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인 블레셋 왕과는 친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 다 설명해 드릴 수는 없지만 그 이유는 사울을 피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블레셋 땅에 들어가야만 했고 블레셋 왕에게 잘 보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과 원수지만 블레셋과는 어쩔 수 없이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전 귀절은 바로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블레셋을 도와 전쟁에 나간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어느 나라와 전쟁하였겠습니까? 놀래지 마십시요.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땅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편을 들어 전쟁에 나간 것입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인데도…. 다행히 블레셋 군인들이 다윗을 보더니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면서 함께 전쟁에 나갈 것을 거절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못 이기는 척하고 자기가 거한 땅 시글락으로 돌아옵니다. 이 장면이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입니다. 1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제 삼일에 시글락에 이를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로하였는데.”
다윗이 블레셋왕을 도와 전쟁에 나간 사이에 자기가 거하여 살던 시글락이 침공을 당했습니다. 그 다음 귀절들을 보면, “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 아내와 자녀들이 다 잡혀 간 것을 보고 모두 소리높여 울었습니다. 다윗을 포함한 다윗을 따르던 모든 자들이 함께 울었습니다. 함께 이렇게 소리 높여 울었으면 하나가 되었을만도 한데 그렇지 못한 것같습니다. 6절 말씀을 보면,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사람들은 다윗을 돌로 죽이자고 합니다. 아무리 그 동안 존경하고 따르던 리더라도 어쩔수 없습니다. 자기들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앗아가게 한 장본인이니 모두 다윗을 원망합니다. 이 때 다윗은 어떻게 행하였을까요?
첫번째로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먼저 다윗은 후회했을 거라는 생각이듭니다. “왜 내가 블레셋을 돕는다고 나갔던고.” 사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는 것인데 이스라엘인이 블레셋을 도왔다면 당연히 반역자가 아닙니까? 다윗은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따랐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들 수 밖에…. 과연 다윗이 후회했을까요? 후회했다면 당연히 백성들에게 사과를 해야죠. 아니면 현대식으로 하면 위원회를 만들어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분석 조사하게 하였겠죠.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새표준 번역이 좀 더 실감나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큰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
다윗은 후회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지난 일을 연구 검토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했을까요? 7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청컨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오매.”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던 옷입니다. 이 에봇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곧 다윗은 예식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예식만을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8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예식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예식을 치른다고 항상 하나님께서 응답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며 드리는 예식 가운데 하나님은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교리도 아니요 방법도 아니요 예식도 아닌 것입니다. 이 모든 것보다 먼저 행하여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지난 부흥회에서 강사 목사님을 통하여 아주 도전적인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새로 오신 교우님이 계셨는데 개업을 하였다며 심방을 원하셨습니다. 한시간 이상 걸려 가게에 도착했습니다. 아주 큰 바쁜 사업체였습니다. 목사님이 도착했는데 교우님은 자기 일이 바빠서인지 슬쩍 인사만 하고 이삼십분간 목사님을 그냥 세워놓았습니다. 시간이 겨우 나서 목사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기도나 해주고 가세요.” 목사님은 “바쁘신데 기도받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밑져야 본전인데요.” 육년이 지나 한국 어느 교회 수요 예배 설교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가 막힌 내용인지라 이 이야기를 설교 시간에 하셨다고 합니다. 예배 후 어느 집사님 내외가 보자고 하여서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하는 말이, “저희가 그 장본인입니다.”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밑져야 본전으로 받은 기도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업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산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나름대로 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듯 합니다. 처음 말씀드린 장로교인들이나 감리교인들이나 천주교인 모두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그런 결론을 아마도 내렸을 것입니다.
유대인 농부가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금요일 일몰서부터 시작되는데 일하다가 깜빡 일몰이 지나도록 밭에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집으로 가지 못하고 밭에서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안식일이 끝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랍비를 만났습니다. 랍비는 농부에게 묻습니다.
“밭에서 하루 종일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까? 기도는 하셨습니까?”
농부가 대답합니다.
“랍비, 나는 지식이 많은 자가 아닙니다. 나는 기도를 하는 방법도 모릅니다. 나는 그저 알파벳을 하루 종일 외웠죠.”
“아니 알파벳을 외우면 어떡합니까,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지.”
“저는 어떤 내용을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서 알파벳을 외운 것이죠. 하나님께서 알파벳을 가지고 필요하신 대로 기도문을 만드실 것 아니에요?”
저는 이 농부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자의 모습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부는 하나님을 의지할 줄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드려야할지 어떤 내용의 기도를 드려야 할지 몰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 종일 기도한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abcdefg….” 한국말로하면 “ㄱㄴㄷㄹㅁㅂㅅ….”
이 농부가 주는 귀한 교훈이 있는 줄 압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은 너무 많이 아는 듯이 보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온 세상일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우리의 교리 우리의 방법 우리의 예식으로는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어느덧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붙잡아 놓았습니다. 다음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 모습을 잘 설명해 줍니다.
스키너(Skinner)라는 심리학자가 쥐를 가지고 실험을 하였습니다. 종을 달아 놓고 쥐들이 종을 치면 밥이 나오게 했습니다. 쥐들은 우연히 종을 치니 밥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배가 고프면 종을 칩니다. 밥이 나옵니다. 얼마 후 스키너 박사는 방법을 달리했습니다. 종을 아무리 쳐도 밥을 주지 않고 6시간 만에 꼬박 꼬박 밥을 주었습니다. 쥐들은 종을 쳐도 밥이 안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쥐들은 종을 빙빙 돌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밥이 또 나왔습니다. 쥐들은 착각합니다. 자기들이 돌기에 밥이 나오는 줄 알기 시작했습니다. 쥐들은 배가 고프면 종을 돕니다. 그러나 쥐들에 상관없이 시간이 되면 밥은 나옵니다. 하지만 쥐들은 이것도 모르고 자기들의 행위로 밥이 나오는 줄로 철석같이 믿고 계속 종 주위를 돕니다. 스키너 박사는 이것을 종교적 행위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들의 교리 우리들의 방법 우리들의 예식도 이와 같은 종교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진정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은 이 농부의 기도가 아니겠습니가? “ㄱㄴㄷㄹㅁㅂ…”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 이것 이외에 참 종교적 행위가 있을까요?
알파벳만 나열한다는 것은 우리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입니다. 물론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죠. 혼자서만 해야죠. 그런 기도를 하는 자들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하시는 것을 종종 체험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기도제목을 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대개가 모르실텐데 옆에 앉아계신 분을 위해서 기도 드릴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가나다라마바사….”
잠시 후 성령을 통한 음성을 들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대신 기도하심을 느끼실 것입니다. 다윗이 아마 그런 경험을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본문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도우려다가 돌아 왔을 때 자기가 살던 곳을 아말렉이 와서 쓸고 간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백성들의 아우성을 들었을 때 다윗은 앞이 깜깜했을 것입니다. 무어라고 기도해야 될 것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는 무조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더욱 의지합니다. 아마 그도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냥 히브리 알파벳을 하나님께 올렸을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응답하신 것입니다.
최근 저희교회 교우님이 되신 분들을 통하여 얼마 전에 두주간 말씀드린 “예배하는 나그네”라는 설교에 많은 힘을 얻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그러한 설교를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곧 생각이 든 것은 앞으로 매주 계속해서 ‘나그네’설교를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되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이기 때문에 가정의 기도의 제목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는 “가나다라마바사아…”
교우 여러분, 오늘 임직을 받으시는 제직 여러분;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알파벳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특별히 새로 오신 나그네 교우분들을 위하여 알파벳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드린 알파벳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알파벳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19세기 미국의 대 부흥역사의 주역이었던 무디(D L Moody)가 있습니다. 어느 집회에서 무디 목사님이라고 소개하니 그는 단상에 나와서 곧 바로 수정합니다. “저는 목사가 아닙니다. 저는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실 초등학교 3학년 중퇴입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무디가 목사 안수도 안 받았으면서 대 부흥운동의 주역이 된 이유를 바로 초등학교 3학년 중퇴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갖고 있었던 독특한 삶의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배우려는 자세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세를 소유한 그를 하나님은 크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의 삶 자체는 그가 초등학교 삼학년 때까지 배운 알파벳으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삶의 주변을 우리가 초등학교 삼학년 때까지 배운 알파벳으로 가득 채우십시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무디를 통해 일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리시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며 알파벳을 하나님께 드리십시다. 이 세상은 우리들의 알파벳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윗은 큰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