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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밤

날짜 : 2007.08.12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여호와의 밤
성경본문 : 출애굽기 12장 37-42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8-12-2007.wmv

산 속 깊은 곳에 한 예쁜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늘 산속을 다니며 즐겁게 뛰어 놀곤 하였습니다. 하루는 너무 즐겁게 뛰어 놀다가 그 만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점점 어두워지면서 소녀의 마음도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집에서 기다리는 부모들도…. 부모들은 소녀를 찾으러 나섰습니다. 소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밤이 깊어 갈수록 더욱 열심히 찾습니다.

소녀도 길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됩니다. 지칠대로 지친 소녀는 피곤함을 못 이기고 바위 밑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부모들은 모든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아니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도와주러 온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떠납니다. 아빠만 남았습니다. 아빠는 밤새껏 찾습니다. 아침까지 찾았습니다.

새벽 동이 틀 무렵 아빠는 바위틈에서 자고 있는 딸을 찾아냈습니다. 아빠는 바위로 딸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 갑니다. 소녀는 잠에서 깨면서 눈을 비빕니다. 아빠의 품에 안기며 소리칩니다. “Daddy, I found you.”(이제 내가 아빠를 찾았네.)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빠는 딸의 이 말을 들으며 “아니야 내가 너를 찾았어” 말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으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아빠가 소녀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누군가 누구를 찾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남이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누가 누구를 찾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미소를 지으며 이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의 마침이 소녀의 외침으로 끝나도 즐겁기만 합니다. “Daddy, I found you.” 그런데 이 고백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고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장 인간적인 고백이자 가장 행복한 고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62년전 8월 15일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이 노래를 불렀으리라 생각됩니다. “Daddy, I found you.”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과 함께 한반도 전국에 해방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모두가 소리쳤을 것입니다. “Daddy, I found you.” 그 누구 하나 “히로시마에 떨어지 폭탄 때문이라구? 그러면 미국이 우리를 해방시킨 것이네, 미국 만세”라고 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러한 분석은 뒤에 하기로 하고 모두 소리쳤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만세” “Daddy, I found you.”

그 당시 찍은 사진을 한번쯤은 다 보셨을 줄 압니다. 교과서나 역사책에 보면 쉽게 볼 수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많은 인파들이 거리에 나와 있고 큰 글자로 쓰여진 배너를 두사람이 들고 있습니다. ‘축 해방’, 결코 ‘미국 만세’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해방된 것을 기뻐하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그 것이 진정한 기쁨이요 해방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떨어뜨려 대한민국의 해방에 큰 역할을 한 미국인들은 우리의 이러한 생각을 어떻게 받아드릴까요?

그러면 오래 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그들은 어떠한 고백을 하였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떠한 고백을 기다리고 계셨는지 살펴 볼만 합니다. 오늘 해방62주년 기념예배를 맞이하며 참 해방은 무엇인지 참 자유한 자들의 고백은 무엇인지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이 사백 삼십년의 노예생활을 마치고 해방되는 첫째 날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기자는 다음과 같이 그 당시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37에서 39절 까지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그들이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

제일 먼저 그들이 이동한 지리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암셋은 처음 야곱이 내려가서 살던 고센땅에 속한 도시입니다. 숙곳은 이집트의 북서쪽에 있는 땅입니다. 한편 이들은 급히 나오느라고 무교병을 구워서 먹으면서 나왔습니다.

무교병을 구워 먹고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출애굽기기자는 이스라엘 민족을 평범한 민족, 아니 무엇인가 쫓기는 듯한 가련한 민족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얼마나 가련한 민족이면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만든 무교병 떡을 구워 먹고 나옵니까? 무교병을 구워 먹으며 이스라엘 민족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철없는 자녀들은 불평했을지 모릅니다. “엄마 맛이 없어 나 안 먹을래.”그 말을 듣는 부모들은 대답할 말을 잃었을 것입니다. 늘 자녀들에게 우리는 택함 받은 민족이라고 세뇌시켜 놓았었는데 택함 받은 자녀가 먹는 것이 고작 무교병이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41절에 갑자기 톤을 바꿉니다.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기자는 놀라운 표현을 합니다. 기자는 더 이상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군대’라고 표현합니다. 무교병을 구워 먹던 자들이 바로 여호와의 군대였습니다. 유교병을 먹는 자들에게 그들은 하찮게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이었습니다. 무교병을 먹으며 애굽을 나오는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의 군대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서 해방은 “Daddy, I found you”라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사실 그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말을 기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요.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로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개인이나 민족에게 모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군대임을 발견합니다. 비록 무교병을 먹고 있지만 하나님의 군사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해방입니다.

이로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방의 특징은 해방을 얻은 후에 열심히 훈련을 받고 이에 합격하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방을 체험하는 순간 이미 군인이, 군대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백할 수 있습니다. “Daddy, I found you.” 이 고백을 하는 자들이 바로 해방의 군대인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은 전혀 화나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말씀하십니다. “그래 네가 나를 찾았어. 너는 나의 히어로(hero)야.” 해방은 아무 훈련 없이 어느 순간 히어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어느 순간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군대가 된 이스라엘 민족에게 요구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42절 말씀입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하나님의 군대가 된 그들이 받아야 하는 훈련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받아야 하는 훈련은 밤을 지키는 일입니다. 여호와의 밤을 지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Daddy, I found you” 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맞아 너희가 나를 찾았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 말씀하시길 “그런데 하나만 들어줄래? 이 밤을 지켜. 유월절의 신비를 맛보아.”

이제 해방의 기쁨을 맞이한 이스라엘민족은 그 밤을 지킵니다. 사실 그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너무 성급하게 나오던 나머지 무어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양을 잡으라고 해서 양을 잡았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해서 발랐고 급한 나머지 무교병을 구워먹고 나왔습니다. 이제 해방의 첫날밤을 맞이했습니다. 그 밤에 처음으로 유월절의 신비를 생각하게 됩니다. 왜 자기들이 양을 잡았어야 했는지 깊은 생각에 젖습니다. 그 피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 밤을 통해서 어떻게 자기들과 같은 노예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었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이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훈련 과제였습니다. 총과 칼의 훈련이 아니라 어떻게 자기들이 해방이 되었는지 어떻게 자기들이 노예의 옷을 벗고 하나님의 군복을 입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은 신학적으로는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듬어 봅니다. 자기들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기에 자기들의 가족은 하나도 죽지 않은 것을 발견하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반면 양의 피를 바르지 아니한 모든 애굽인들의 가정에는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음을 생각하며 기이한 생각에 잠깁니다. 그러면서 그 어린 양의 의미가 무엇인가 더듬어 봅니다. 결국 이 밤을 진정으로 잘 지키는 자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유월절 어린 양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세상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픔을 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눈물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눈물을 보는 것이 해방입니다, 참 자유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눈물을 보는 자들은 어느덧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의 총과 칼을 든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물을 보는 자들입니다. 이 들이 참으로 자유한 자들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역군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어느덧 하나님의 눈물을 소유한 자들이 되어 갑니다.

오늘 8.15 광복절 기념예배를 드립니다. 처음에 해방을 맞이한 후 한국민들이 ‘미국 만세’라고 하지 아니하고 ‘ 축 해방’이라고 한 것을 잘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참된 해방은 ‘축 해방’이나 ‘미국 만세’나 상관이 없습니다. 참된 해방은 우리의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셨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를 위해 흘리신 하나님의 눈물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눈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막연하게 눈물을 흘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눈을 들어 이웃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눈물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던 하나님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슬픈 이웃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한 해방의 기쁨을 누립니다.

해방 후 우리나라는 많은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세계 경제 대열에 들어간 것이 해방의 완성이 아닙니다. 이웃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때 해방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해방’하면 빼 놓을 수 없는 분이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입니다. 링컨도 사실 슬픔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링컨은 1865년 4월에 암살을 당합니다. 암살당하기 2년 전 정확히는 1863년 1월1일 노예해방 선언을 합니다. 그런데 노예해방선언하기까지 링컨은 개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가 노예해방 선언을 하기 위해서는 그는 1862년 혹독한 인생의 겨울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가장 아끼던 아들 윌리(Willie)를 잃습니다. 그 사건은 12년 전 아들을 잃었던 충격위에 두번째 아들을 잃는 더더욱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안겨준 것입니다.

이러한 슬픔 가운데 있던 링컨에게 어느 방문객이 찾아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당신의 아들은 살았소.” 그 말씀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아니 당신을 위해 슬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물을 만난 것입니다. 그 후 그는 흑인들의 슬픔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됩니다. 흑인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자가 되어 갑니다. 이에 그는 흑인들의 눈물을 보는 자가 되었고 흑인 해방 선언문을 1863년 1월1일 발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것을 발표함과 아울러 링컨은 진실로 자유한 자가 된 것입니다. 한편 해방된 흑인들은 링컨의 눈물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흑인들은 외친 것입니다. “I found your tears.” 흑인 해방은 하나님의 눈물 흑인들의 눈물 링컨의 눈물이 합쳐졌을 때 이루어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참으로 자유한 자들인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미국에 산다고 자유한 자가 아닙니다. 참으로 자유한 자들은 세 가지 슬픔을 압니다. 참으로 자유한 자들은 자신의 죄로 인한 자신의 슬픔을 압니다. 아울러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슬픔을 압니다. 또한 이웃의 슬픔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웃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때 자유는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참 해방이 오는 것입니다. 이웃이 언젠가 우리의 눈물을 발견하고 “I found your tears”외칠 때 참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간 한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자유하십니까? 혹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없으신가요? 이 세상에서 나보다 슬픈 사람은 없는데요? 과연 그럴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눈을 조그만 뜨면 아니 눈을 반쯤, 아니 반쯤도 아니고 빛이 스며들어 올 정도로만 떠도 우리는 우리의 눈물을 필요로 하는 곳을 수없이 보게 됩니다. 우리보다 더 슬픈 사람을 수도 없이 보게 됩니다.

오늘은 해방이 주제인 만큼 노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어느 때 인류 역사상 노예가 제일 많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놀라지 마십시요. 현재가 제일 많다고 합니다. 숫자적으로는 정확할 수 없지만 어떤 자료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2천만명의 노예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자료는 그 것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일년에 50만명이 노예로 팔려 간다고 합니다.

요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전쟁으로 많은 고아들이 생겼는데 그 고아들 중 많은 아이들이 결국 노예로 팔려가게 된다고 합니다. 현재 전사자들만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되지만 보이지 않는 많은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 노예제도가 거의 부활하다시피 한 나라가 수단인데 약 20만명이 노예처럼 생활하고 있다고 영국의 BBC방송은 보도합니다. 수많은 미성년자들이 원하지 않는 곳에서 혹사당하고 있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유니세프(UNICEF)의 보고에 의하면 현재 세계적으로 5-14살 어린이들 중 2억 1천 1백만 어린이들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중 강제적으로 일을 하는 어린이들은 5‐6백만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들 중 절반은 태어나면서 노예처럼 태어났고 나머지 절반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 의하여 팔려서 노예가 되었다고 합니다. 유흥가에 팔려가서 고생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로써 알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지는 못하는 반면 전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노예가 되어서 고생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눈을 뜬다면 우리는 쉽게 우리의 눈물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게 됩니다.

저는 오늘 설교준비를 하면서 한 가지 하나님께 질문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오늘날 불쌍한 노예가 많습니까? 하나님 무엇하십니까? 이들을 안 돌보십니까?”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을 안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저 혼자서 대신 하나님 응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너의 눈물을 보기 위해서다. 너 그들을 위하여 얼마나 눈물을 흘렸니? 눈물을 흘리기 전에는 그런 질문할 자격도 없어”

교우여러분, 여호와의 밤을 지키십시다. 밤을 지새우면서 이웃의 슬픔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립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웃의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면서 가장 자유한 삶을 사신 분 중에 영국의 유명한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있습니다. 그가 “어린 흑인 소년(The Little Black Boy)”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이 꼭 흑인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만큼 시인은 흑인의 고통에 삶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린 흑인 소년

내 어머니는 남쪽광야에서 나를 낳으셨다.
나는 검다…. 하지만
오… 나의 영혼은 순백이다.
천사처럼 하얀 영국아이…
그렇지만 빛을 빼앗긴 것처럼 나는 검다

나의 어머니는 나무 밑에서 나에게 말씀해주셨다.

(중략)

이 검은 몸과 햇빛에 그을린 얼굴은
그저 구름이며 그늘진 작은 숲에 지나지 않는 것이란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열기를 배워서 견디어내면
구름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란다.

(중략)

나는 영국 아이에게 말했다.
내가 검은 구름에서 자유롭고 네가 하얀 구름에서 자유로울 때,
우리는 기쁨으로 가득차 양들처럼 신의 천막주위를 뛰어 놀 것이다.

열기가 내려쬘 때,
나는 그가 견딜 수 있도록 그늘을 만들어 줄 것이리니.
기쁨에 넘쳐 우리 아버지의 무릎에서 배울 수 있도록…

그리고 그런 다음 나는 일어서서 그의 은빛 머리를 만지고
그와 같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되리라.

이 시를 읽으면 누구나 백인이 쓴 시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이 시 전체를 흐르고 있습니다. 시인은 흑인의 고통을 너무도 뼈저리게 체험하던 중 어느덧 아가페의 사랑으로 백인 소년을 사랑하고 있으며 백은 소년은 드디어 흑인 소년의 눈물로 사랑을 배우게 된다는 내용의 시입니다. 결국 흑인과 백인이 함께 해방을 누리는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백인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이런 놀라운 시를 쓴 것은 그는 흑인들을 위한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여호와의 밤을 지킨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아울러 흑인들은 그 눈물을 발견한 것입니다. “I found your tears.”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눈물을 바라보십시다. 이웃의 슬픔을 느껴 보십시다.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십시다. 우리들의 눈물은 언젠가 누구에 의해선가 발견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로 인해 인류의 참 해방은 가까이 올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월절 양이 되어 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는 언젠가 주님을 향해 소리칠 것입니다. “I found you.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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