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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디디야

날짜 : 2007.06.17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여디디야
성경본문 : 사무엘 하 12장 7-12절, 16장 20-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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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크게 다친 독수리 한 마리가 벼랑 위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하늘 높이 날아 오르려고 했으나 다친 날개로는 도저히 하늘 높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 수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거야.”

그는 날기를 포기하고 지난 날을 생각했습니다. 태어나자마나 형제들을 벼랑 아래로 떨어뜨리던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넌 위대한 독수리가 될 자격이 있다!”

형제들 가운데서 살아남자 그에게 뺨을 비비며 기뻐하던 아버지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보다 더 이상 위대한 독수리로 살아갈 수 없게 된 상처의 아픔이 더 컸습니다.

“나는 평범한 새가 아니야. 가장 하늘 높이 나는 새들의 왕이야. 그런데 이게 뭐야. 이제 가장 낮게 나는 새가 되어버렸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는 벼랑 아래를 오랫동안 내려다 보았습니다. 벼랑 아래에는 죽은 독수리의 뼈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아버지의 뼈도 쌓여 있었습니다.

“독수리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은 이 방법밖에 없어!”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벼랑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몸을 잔뜩 웅크렸습니다.

순간, 어디선가 대장 독수리가 쏜살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잠깐!” 하고 소리쳤습니다.

“형제여, 왜 자살을 하려고 하는가?”

대장 독수리가 그를 가로막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니? 왜 그런 생각을 다 하는가?”

“저는 더 이상 높이 날 수가 없습니다. 독수리의 명예를 잃게 되었습니다.”

대장 독수리는 한참동안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날개를 활짝 폈습니다. 그의 몸엔 여기저기 상처 자국이 나있었습니다. 솔가지에 찢긴 자국, 다른 독수리에게 할퀸 자국 등 수많은 상흔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나를 봐라. 내 온몸도 이렇게 상처투성이잖니. 상처 없는 독수리가 어디 있겠니.”

자살하려고 했던 독수리는 대장 독수리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그러자 대장 독수리가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이건 겉에 드러난 상처일 뿐이다. 내 마음의 상처는 이보다 더하다. 일어나 날아보자. 상처 없는 독수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 독수리뿐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이야기 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공주병 왕자병이 유행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큰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의 유형을 보면 어떻게 보면 상처없이 왕자와 같고 공주와 같은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좋은 가정에서 자라고 좋은 학교 다니고 안정된 직장을 얻는 것이 많은 신앙인들의 소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축복인냥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젖어 있는 우리들에게 독수리 우화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한번 살펴보게 합니다. 무엇이 참 신앙인의 모습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분명한 것은 참 신앙은 결코 공주병 왕자병자들을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먼 줄 압니다.

사실 독수리 우화를 들으니 마음속에 작은 감동이 오지 않습니까? 우리들 마음 속에 작게나마 감동이 있다면 우리들 깊은 마음 속에는 독수리와 같이 되고자하는 갈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몸에 상처를 지녔을지라도 독수리가 되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줄 압니다. 세상은 공주병 왕자병자들로 우리를 만들어가려 하지만 우리들 깊은 곳에 있는 참 자아는 상처난 독수리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상처를 안고 있지만 하늘을 훨훨 나는 독수리가 되고자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또 다시 다윗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바로 다윗이 상처난 독수리라고 생각합니다. 상처를 안고 하늘을 훨훨 날았던 독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골리앗을 물맷돌로 쳐 죽임으로서 독수리임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 후 많은 인생의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때 마다 더 놀라운 독수리로 변해갔습니다.

몇년전 Yellowstone Park에 관광을 갔었습니다. 하루는 저희 장인어른이 낚시를 좋아하셔서 높은 곳에 있는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였습니다. 낚시를 하면서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독수리하나가 급강하하더니 철석하며 물고기를 잡아 가지고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높은 나무가지에 앉는 것을 보았습니다. 늘 TV로 보아 오던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제 뇌리에 생생합니다. 역시 독수리는 독수리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것보다 더 멋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맷돌 하나로 거장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온 군중은 환호했을 것입니다. 아니 황홀감에 젖었을 것입니다. 과연 다윗은 독수리였습니다.

독수리 다윗은 곧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나라는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나라의 평정을 찾은 후 첫 번째 한 일이 지난 주 함께 생각한대로 요나단의 아들을 찾아서 함께 식사를 나누는 일입니다. 그 것도 절름발이인 므비보셋과 매끼 식사를 나눕니다. 독수리가 절름발이와 매끼 식사를 나누다니 정말로 위대한 왕입니다.

이렇게 착한 일도 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때에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보니 어떤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독수리가 성적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죄를 범합니다. 그 여인은 지금 전쟁에 나가 있는 우리아라는 장군의 아내입니다. 얼마후 소식이 오는데 그 여인이 임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큰 일이 났습니다. 이를 숨기려고 곧이어 장군을 불러 들입니다. 그러나 장군은 집으로 가지 않고 전쟁에서 싸우는 부하들을 생각하며 왕궁문에서 잡니다. 작전에 실패한 다윗은 우리아를 최전방에서 싸우게 합니다. 전사시키기 위함입니다. 그의 계획대로 우리아가 전사했습니다. 독수리 다윗은 밧세바를 간음하였으며 그의 남편을 죽인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냅니다. 나단은 먼저 부자가 가난한 농부의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때 다윗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늘 첫 본문 바로 전 귀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이에 나단이 말합니다. 오늘 첫번째 본문 말씀입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다윗은 가슴이 철렁하였을 것입니다. 정신이 나간채 어리둥절하였을 것입니다. 정신 나간 독수리 다윗에게 나단은 쏘아 부칩니다. 9절 말씀입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다윗은 하나님은 속일수 없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을 속일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다윗은 재판장되시는 하나님앞에서 엄한 판결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명이 확증이 되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고개를 숙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형량 선고가 남았습니다. 계속해서 나단의 입을 통하여 형량이 발표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칼이 영영히 네 집에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형량이 선고되었습니다. 곧 다윗집에 늘 분쟁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집안에 싸우고 죽이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벌입니까? 다윗은 정신을 잃습니다. 한번의 실수로 시작이 되어 자기의 충성된 장군까지 죽인 죄로 인해 자신의 가문에 영원토록 싸움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앞이 깜깜해졌을 것입니다. 자기가 무덤에 들어 가도 이 죄의 형량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문이 이 땅에 존속하는한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계속 형량이 선포됩니다. 11,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

다윗은 눈물이 앞을 가렸을 것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들이 남들에게 고통을 당하는 장면이 눈 앞에 어른 거립니다. 다윗에게는 두 가지 형량이 선고된 것이고 다윗은 묵묵히 이 형량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죄를 졌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두가지 형량을 선고하십니다. 하나는 우리의 가정에 늘 불화가 있을 것이고 아니 가정이 아니라 자손만대 불화가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랑하는 가족이 나로 인해서 큰 고통을 당할 것이고….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이 것이 독수리 다윗의 고통이었습니다. 아니 다윗의 상처였습니다.

다윗은 평생 나단의 선고를 가슴에 안고 살아 갑니다. 고통 중에 살아 갑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처럼 고생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당신이 선고한 형량을 감형시키셨을까요?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그럴 것도 같지 않습니까?

오늘 두 번째 본문 말씀을 살펴 볼까요? 20절 말씀입니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모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지금 이 장면은 나단의 예언대로 다윗집에 칼이 임해서 아들인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여 쿠테타를 일으킨 장면입니다. 다윗왕은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 가버렸습니다. 이 때 압살롬은 자기의 오른 팔인 아히도벨에게 묻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루살렘을 차지하였는데 무엇을 하랴?” 이에 아히도벨은 나단이 예언한대로 왕의 후궁들을 범하게 합니다. 22절 말씀입니다.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지붕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니라.”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나단의 예언이 이루워졌습니다. 그것도 자기의 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처럼 쉽게 당신의 형량을 감형시키신 것 같지 않습니다. 다윗은 정확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벌을 감당할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대체 이 일이 다윗이 죄를 범한지 얼마만에 일어났는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나단의 선고가 있은 후 13년만에 이 일이 벌어집니다. “너의 처들이 백주에 남들에게 피해를 당하리라” 선언한지 13년만에 그대로 이루워집니다. 이 시간에 어떻게 13년이 되었는지 설명해드릴 시간은 없습니다. 그냥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아마 10년쯤 지난 후에 아무 일이 없으니 이젠 하나님이 자기가 회개를 많이하고 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다 용서해 주셨나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세월이 워낙 많이 지나 자기도 새까맣게 잊어 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13년만에 찾아 왔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12장과 16장인데 그 사이 13년이 지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올 해가 2007년 13년 전이면 1994년입니다. 제가 1995년에 본 교회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식으로 하면 1994년에 제가 필라델피아에서 살 때 지었던 죄가 이제 와서 저를 찾아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저는 12년전에 보스톤에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줄로 알았는데 사실 새로운 삶이 아닙니다. 필라델피아의 연속입니다.

13년만의 이 사건은 다윗에게는 경각심을 새롭게 일으키는 사건이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된 사건입니다. 하나는 두번째 형벌은 끝이 났음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더 이상 처들의 고생은 끝이 났음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더 큰 것은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선고를 감하지 않으시고 잊지 않으심을 알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집에 계속 칼이 임할 것을 확인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한가지 형벌은 끝이 났지만 나머지는 계속 찾아 올 것을 재확인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상의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여러분의 머리에 오고 갈 것입니다. 한 가지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이 있다면, 먼저 우리들의 죄가 10년 20년만에도 찾아 온다니 소름이 끼칩니다. 우리 모두 죄를 짖고 또 지으니 우리의 삶이 편할 날이 없음이 당연지사로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찾아 올 인생 파도를 어떻게 견딜까 두려움이 앞섭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너무하시다. 다윗이 왕인데 왕으로서 그 정도 범하는 것은 상식인데 그 것가지고 그토록 벌하시다닌 하나님 너무하시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같아서는 국가 원수라고 하면 그런 죄 정도는 죄도 아니지 않습니까?

또 마지막으로는 “정말 다윗 대단하구나 정말로 독수리구나 그러한 인생의 고통 가운데서도 그렇게 많은 시편을 지으면서 살았다니 정말로 대단한 독수리구나.” 정말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다윗은 이런 역경가운데서 그런 아름다운 시편을 지으면서 멋지게 삶을 영위할수 있었을까요?

다음의 이야기가 다윗의 모습을 한눈에 읽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김장환 목사님께서 물살이 거친 계절에 제주도에 가 보신적이 있다고 합니다. 바람도 세차게 불어 유난히 파도가 높던 어느 날, 해녀 한 명이 바다에 뛰어 들어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나 걱정스러워 다가가 물었습니다. “이렇게 바람이 불고 풍랑이 거센 날에도 바다에 들어가십니까?” 그러나 해녀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풍랑이 바다 위에 있지, 바닷속에도 있나요?”

풍랑은 바다 위에만 있지 바다 깊은 곳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깊은 곳에는 해녀들이 좋아하는 많은 선물들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해녀의 모습이 바로 다윗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다윗을 독수리로 비유하다가 갑자기 해녀로 둔갑시켜서 죄송합니다만 어떻게 보면 독수리와 해녀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봅니다. 해녀나 독수리는 폭풍을 뚫고 삽니다. 아니 폭풍을 넘어 있는 세계를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바로 폭풍넘어의 세계를 알고 체험하며 살았던 분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폭풍 가운데서도 최고로 아름다운 삶을 영위했던 것입니다. 폭풍속에 있는 놀라운 세계를 체험했습니다. 수많은 시편을 짓게되었습니다. 시편 23편과 같은 아름다운 시를 지을수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면 어떻게 다윗은 그런 삶을 살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폭풍을 넘어 새 세계를 바라보며 살수 있었을까요?

오늘 봉독해 드리지 않았지만 12:24, 25절에 다윗이 다윗이 될수 있었던 놀라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다윗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번째 아들 솔로몬에게 다른 이름을 선물로 줍니다. ‘여디디야,’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음.’ 다윗은 풍랑이 심한 바다밑으로 들어가 은혜의 세계를 맛보게 됩니다. 풍랑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가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삶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와 다윗과의 큰 차이가 있다면 다윗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형벌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로 인한 인생의 파도를 알았습니다.

반면 우리는 인생의 파도는 다윗처럼 갖고 있는데 다른 점 하나는 우리의 어떤 죄로 인해 언제 지은 죄로 인해 아니면 우리 가족의 누구의 죄로 인해 우리에게 파도가 오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똑같은 것은 다윗이나 우리 모두 인생의 파도를 겪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서도 깊은 바닷속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파도와 상관이 없는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상처받은 독수리들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서 때로는 이웃의 죄로 인해서 우리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상처는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상처를 받으면 안되는 연약한 인간이라고 유인합니다. 그래서 공주처럼 살아야한다고 왕자처럼 살아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파도를 피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공주와 같이 왕자와 같이 살 수있는 법은 없습니다. 언제나 인생은 파도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잘 따르던 자도 실수할수 밖에 없었고 이에 그에 따른 매서운 파도를 맞이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결국 파도속으로 뚫고 들어 간 것입니다. 그 안에 놀라운 은혜의 세계가 있음을 믿고 자신의 몸을 자신의 삶을 파도 속으로 던진 것입니다. 파도 속으로 던질때마다 그는 ‘여디디야’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아름다운 시편을 수없이 창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편은 다윗의 가문이 없어진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영혼을 울리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인생의 파도가 여러분의 삶 앞에서 늘 넘실거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잊지 마십시다. 인생의 파도 안에 ‘여디디야’라는 보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독수리의 심정으로 그 보석을 낚아 채기 위해 여러분의 삶을 던지시기 바랍니다. 깊은 곳에서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을 체험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역사에로 여러분들을 부르는 초대장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인간 역사의 초댓장에 ‘예스’로 응답한 한 사람의 모습을 소개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간음과 살인죄를 지은 다윗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는 여디디야의 초댓장이 주어져 있음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아니 예수 믿는 모든 이들에게는 이 초대장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초대장을 손에들고 오는 파도를 향하여 힘차게 뛰어 들어 가 봅시다.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파도만 보면 절망입니다. 그러나 파도속에 있는 보석을 생각하시면 파도도 무섭지 않습니다. 함께 보석을 찾으러 나섭시다. 인생의 어떠한 파도에도 보석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Chet Raymo라는 Stonehill College교수가 ‘길’(the Path)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내용은 그분이 집에서 학교까지 1마일 거리인데 늘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고 합니다. 매일같이 37년간을 걸어서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백합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느끼면서 그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아니 그 길에서 우주를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 책의 부제를 ‘A One-Mile Walk Through the Universe’라고 붙였습니다. 매일같이 그는 그 길을 걸으면서 우주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천문학자입니다. 광대한 우주를 망원경으로 늘 바라보는 그가 매일 매일의 산책 등교길에서 우주를 만났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깊은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산책길에서 우주를 만나지 않겠습니까? 매일 매일 우리도 1마일의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1마일에는 늘 파도가 넘실거립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파도가 치는 인생길이 기다리고 있어도 바로 그 안에 보석과 같은 하나님의 우주적 은혜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보이는 인생의 파도로 인해서 그안에 담겨진 보석을 놓지지 마십시다.

교우 여러분, 인생은 파도안에 담겨져 있는 보석을 찾는 것이 아닐까요? 독수리가 되십시다. 상처난 독수리가 되십시다. 깊은 파도로 우리의 삶을 던져 보십시다. ‘여디디야’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길입니다.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우주적 사랑의 세계로 인도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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