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7.06.1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다윗과 므비보셋
성경본문 : 사무엘 하 9장 1-8절, 16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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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세계2차대전이 연합군쪽으로 전세가 기울기 시작할 때입니다. 영국 소련 미국 세 국가의 원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곧 소련의 스탈린, 영국의 Winston Churchill, 미국의 Roosevelt대통령이 자리를 같이 한 것입니다. 이 정상회담을 Eureka summit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정상회담이 지금 생각하기엔 너무 아이러니칼한 곳에서 모였습니다. 현재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모였습니다. 이들은 테헤란에서 장래의 세계 정세를 의논하였습니다.
이들이 이곳에서 독일과 일본에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 미국 New Mexico에서는 또 다른 중요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Einstein의 연구업적중에 하나인 핵폭탄이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1939년에 Einstein은 Roosevelt 대통령에게 핵폭탄의 가능성을 시사하였고 이에 핵폭탄 연구가 본격화되었던 것입니다.
잘 아시는바대로 Eureka summit후 2년이 못 미쳐서 핵폭탄은 히로시마에 투하되었고 전세계는 잠잠해졌지만 새로운 공포가 전세계를 덮게 되었습니다. 원자탄은 잠시 평화를 가져온듯 하였지만 전 세계의 인류는 그 후 원자탄의 공포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Eureka Summit이 평화를 가져 온 것 같았지만 현대과학의 힘을 빌어 결국은 새로운 공포시대로 인류를 몰아 넣었습니다.
사실 세 국가 원수를 하나로 뭉뚱구려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원자폭탄을 연구하고 사용하도록 허락한 장본인이 Roosevelt 대통령임을 감안할 때 우리는 어쩔수 없이 Roosevelt 대통령에 대해서 새로운 각도에서 역사적 재평가를 해도 무리가 아닐줄 압니다.
결국 Roosevelt 대통령의 결단이 전 세계에 핵폭탄 경쟁을 시작하게 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전세계 인류를 핵공포에 몰아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줄 압니다. 미국 역사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제가 감히 Roosevelt 대통령의 업적을 과소 평가 내지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강조하고픈 것은 강대국의 지도자의 결단은 이처럼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의 결정은 조선땅에는 해방의 선물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한 민족에게는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에게 핵폭탄은 세상 종말을 상징하는 공포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이처럼 세계적으로 상상할수 없는 역사적 자취를 남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지도자들의 비해서 우리와 같은 서민들은 너무도 하잘 것 없이 보입니다. 느껴집니다. 그러기에 저마다 서민보다는 강대국의 대통령이 되려고 많은 돈과 정력을 소모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TV를 키면 수십명의 미국 대통령후보들이 나와서 아니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한 후보들이 나와서 두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려고 열띤 공방을 벌이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열띤 공방을 보고 있노라면 한 가지 생각이 듭니다. ‘대통령도 중요하지만 서민의 가치도 대통령만치 중요함이 인식되는 나라는 언제 올 것인가? 이것은 하나의 꿈인가? 아니 그러한 나라는 못 되더라도 그러한 생각을 가진 대통령이 뽑힐 수는 없을까?’ 그런데 저는 금방 그것은 현실적으로 바랄수 없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정치풍토를 봐서 그런 생각은 좀 현실감각을 잃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곧 이어 든 생각은 ‘그러면 우리 같은 서민이 우리도 대통령처럼 중요한 자취를 남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 그것이 훨씬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 하루 대통령이 백악관을 출근하듯 우리도 우리의 일터에 그와 같은 중대한 소명을 안고 출근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하루의 나의 삶이 온 세계와 온 우주에 작은 파장을 가져 온다고 생각하는 삶,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크리스챤들은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러한 생각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한 돌파구를 소개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은 그 당시에는 작은 나라였지만 이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나라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왕입니다. 다윗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잠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웃나라들이 왕이 다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왕을 구했습니다. 양보의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합니다. 대신 어린 다윗을 세웁니다. 다윗하면 생각나는 것은 골리앗과의 싸움인데 다윗이 왕이 되기 전 골리앗을 죽이는 것은 다윗을 왕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숨은 계획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렸다는 것을 안 사울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갖은 모략을 다 씁니다. 다윗은 늘 사울왕께 쫓겨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의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자기의 원수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세 사람은 있을수 없는 이상야릇한 삼각관계를 이룹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하고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살리려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깊어갑니다. 드디어 둘이서는 피의 계약을 맺습니다. 삼상 18:3, 4절에 보면 사울을 피해 달아나는 다윗과 언약을 맺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세월은 지나 드디어 전쟁터에서 사울왕도 죽고 다윗의 친구 요나단도 죽었습니다. 사울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사울왕이 걱정했던 대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나라가 든든히 세워져 갔고 이제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러면 나라가 안정을 찾았을 때 다윗에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하면 세계를 흔들어 볼까? 폭탄을 만들어 볼까? 아니면 어떻게 하면 최고의 쾌락을 누려볼까?
오늘 첫 본문 말씀이 바로 다윗이 나라가 안정을 되찾게 된 후 취한 첫번째 행위입니다. 9장 1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곧 다윗은 연약해지고 외로워진 사람을 찾아 갑니다. 놀라운 것은 다윗은 “요나단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묻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원수였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묻습니다. 물론 요나단이 사울의 아들이니 사울의 집이라 하면 요나단도 당연히 포함이 됩니다. 그래도 그렇지 다윗은 사울의 집에 은혜를 베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베푸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요나단과 맺은 언약으로 인해서 원수이긴 하지만서도 사울의 집에 은혜를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직계가 아니더래도 요나단의 사촌이래도 요나단으로 인해 은혜를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마침 시바라는 사울의 종이 하나있었습니다. 그에게 다윗왕이 묻습니다. 시바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살아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런데 토를 부칩니다. “그는 절뚝발이니이다.” 시바의 뜻은 그는 절뚝발이인고로 왕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이 당시 절뚝발이는 아무리 레위지파일지라도 제사장이 될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나올수 없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저주받은 자로 낙인이 찍힌 자들이었습니다. 곧 시바는 “절뚝발이인데도 괜챦겠습니까?” 묻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혀 못들었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을 데려 오게 한 후 그에게 말합니다.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찌니라.”
므비보셋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왕의 앞에 나와 서는 것도 두렵고 떨리는데 앞으로 왕과 함께 식탁을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할아버지의 땅 곧 사울왕의 땅을 다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울왕의 땅이니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므비보셋은 놀랍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도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러한 일을 할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워낙 마음이 넓어서? 다윗은 약속의 사람입니다. 요나단과 약속하였고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킵니다. 요나단의 사촌 오촌까지도 돌보겠다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왕자중에 왕자처럼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행복한 삶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오늘 두 번째 본문말씀은 이상한 상황으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다윗이 마루턱을 지나고 있을 때에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나타납니다. 시바는 다윗을 위해 많은 먹을 것을 준비하고 다윗을 맞습니다. 참 이해가 안되는 상황입니다. 다윗이 무엇엔가 쫓기나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바가 갑자기 많은 식량을 마련하고 다윗을 맞을리가 없습니다.
사실 오늘 두 본문 말씀사이인 10-15장까지는 그 유명한 다윗의 밧세바 간음 사건과 그의 남편 우리아를 살인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벌이 다윗에게 임합니다. 아들인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합니다. 압살롬이 소위 말하는 구테타를 일으킨 것입니다. 아들에게 당할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의 죄를 징벌하십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다윗은 지금 압살롬의 칼을 피해 피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피난가는 장면이 바로 16:1절에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피난가는 다윗에게 시바가 친히 먹을 것을 갖고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다윗이 묻습니다.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 왔느뇨” 시바가 대답합니다. “나귀는 왕의 권속들로 타게 하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다윗은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늘 함께 상에서 밥을 먹던 므비보셋이 안 보입니다. 다윗이 묻습니다.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뇨.” 시바가 대답하기를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좀 풀어서 설명하면 므비보셋이 다윗의 정권을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사울의 집이 이 나라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큰 배신을 당합니다. 그토록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절름발이인 자기를 살려 주었고 그 것도 부족해서 사울의 전 재산을 다 자기에게 물려 주었고 그 것도 부족해서 식사때마다 함께 하는 영광을 베풀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다윗도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이에 다윗이 선언합니다.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므비보셋에게 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시바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시바는 졸지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에 시바가 왕께 절합니다. “내 주 왕이여 나로 왕의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요즘 여성성경공부에서 사무엘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을 배반한 이 장면을 두 주전에 공부를 하였습니다. 므비보셋의 모습을 보면서 모두 분개하셨습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이 공부를 마치며 모두 안타까운 마음을 품었습니다. 하나는 ‘인간 모두에게는 므비보셋과 같은 모습이 있다. 결국은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인간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자들이다.’ 교우님들은 모두 같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사실 다윗은 므비보셋과 하루 세끼를 먹었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를 준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준것입니다. 다윗은 므비보셋과 친구처럼 지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 므비보셋은 다윗을 배신한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려고…. 다윗은 미련한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다윗의 처량한 모습을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Eureka Summit에 모였던 세 국가 원수들이 정말로 위대한 지도자로 보입니다. 연약한 자들을 힘으로 대치하는 왕이 정말로 위대한 지도자임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오늘 본문 말씀으로 봉독해 드리지 않았지만 삼하 19:24부터 므비보셋에 대한 세번째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시간은 지나 압살롬의 쿠테타는 실패하고 다윗이 다시금 왕권을 회복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피난 길이 아니라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돌아 오는 길입니다. 이에 므비보셋의 모습이 24절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집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저는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므비보셋의 모습은 시바가 말한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마 다윗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므비보셋을 혼내줄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생각과는 다릅니다. 이에 의아한듯 다윗왕이 묻습니다.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이에 대답합니다.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결국 므비보셋에 의하면 시바가 므비보셋을 속이고 또 왕을 속인 것입니다. 시바가 므비보셋의 것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막 피난길에서 돌아온 다윗왕은 정신을 잃습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출지 모를 정도 입니다. 그런데 초췌한 므비보셋의 모습을 보면 므비보셋이 옳아 보였을 것입니다. 한동안 므비보셋에 괘씸한 생각을 했던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성급히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에게 준 것도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회로 인간을 함부러 판단할 수 없다는 귀한 교훈을 새로이 받았을 것입니다. 남의 말을 듣고 쉽게 인간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파기했던 것입니다. 약속을 파기한 자신이 미워졌을 것입니다. 몹시도 부끄러워졌을 것입니다.
한편 시바가 괘씸해졌습니다. 자기의 피난길에 돕긴했지만 그 모든 것이 자기를 위했던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다윗은 순간적으로 시바에게 준 것을 다시 므비보셋에게 주라고 명령하고픈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갈팡질팡했을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옳았을까? 시바가 옳을까? 여러분은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요즘식으로 하면 법무장관을 불러서 누가 옳고 그른지 가려내지 않았을까요? 요즘 저희 교회에서 건축을하는데 비싼 돈을 들여서 변호사를 고용했습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야기될 때 해결하기 위함일줄 압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우리들의 삶에 얼마나 깊게 관여되어 있는지 실감이 나고 있습니다.
아니 다윗은 법무장관을 안 부르더라도 자기의 판단으로 둘을 불러 놓고 재판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고 생각하십시다. 결국 그는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립니다.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전혀 상식에 벗어난 판결을 내립니다. 전에 므비보셋이 배반한 줄 알았을 때 다윗은 므비보셋의 재산을 몽땅 시바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시바가 거짓말을 한 것 같은데 엉뚱하게 시바와 나누라고 합니다. 저같이 법을 전혀 모르는 자도 이해가 되지 않는 판결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은 더 이상 인간의 말에 의존하질 않습니다. 도리어 약속을 따라갑니다. 요나단과의 약속, 므비보셋과의 약속, 시바와의 약속을 따라갑니다. 그 결과 다윗은 므비보셋과 시바에게 과거의 잘잘못은 뒤로한채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합니다. 약속의 사람들은 이웃의 잘 못을 캐내려고 눈이 뻘것케 달아 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도리어 이웃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드립니다. 그 모습 그대로 새롭게 삶의 여정을 걸어 가게 합니다. 함께 인간의 삶을 나누자고 합니다. 다윗에게는 므비보셋이 소중했고 므비보셋에게는 시바가 소중했고 시바에게는 다윗이 소중했습니다. 아니 이 셋은 서로 서로 그모습 그대로 소중했습니다. 셋이 함께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삶을 다시금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잃은 마당에 누구의 잘 잘못을 더 이상 따지고 싶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너는 무엇을 잘못했고 너는 이것을 잘못했고 따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자기가 맺은 약속을 파기한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약속의 사람인 그에게는 모두가 소중했습니다. 므비보셋에게 말한 것입니다.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반씩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다. 므비보셋에게 맡기고 알아서 시바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정신으로 그는 또 다시 므비보셋과 식탁을 같이 나누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므비보셋과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다윗왕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의 위대함은 골리앗을 물리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 결과 하찮은 절름발이와 한 평생을 살아간 것입니다. 절름발이인 므비보셋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한 것입니다. 한 때는 시바를 통해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듯 시험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인간의 말을 듣는 것보다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더욱 인간적임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다윗은 무지무지 넓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만납니다. 다윗과 므비보셋과 시바 세 사람 사이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우주적 세계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분이 “God is friendship”이란 말을 했습니다. 우정 안에 참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가 있다는 의미일줄 압니다. 사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친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과의 우정의 관계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구라고 부르셨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친구라고 부르셨을까요? “God is friendship.” 좀 다르게 표현하면 진실된 우정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우정에서 하나님의 우주적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과의 우정은 므비보셋과의 우정으로 이어졌고 곧 이어 시바와의 우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세 우정은 다 다른 색깔의 우정이었을줄 압니다. 요나단, 므비보셋, 시바와의 관계에서 색다른 우정의 세계를 선물로 받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넘치는 우주적 경험을 이 우정 안에서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저도 가까운 친구가 몇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느 하나도 같은 색깔의 우정이 아닙니다. 친구마다 다른 색깔의 우정을 맺고 있습니다. 그 중 어느 것 하나가 the best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여러명의 친구를 주셨고 또 여러가지 우정을 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각기 그 우정 안에는 우주적인 하나님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서로서로 친구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우주적 은혜의 세계입니다.
Eureka Summit에 모였던 세 국가 원수들은 자기들이 우주를 좌지우지 하는 자들인양 착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주적 하나님의 세계를 만나고 있었던 자들은 다윗과 므비보셋과 시바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체험하는 이 우주적 세계는 그 누구에게도 열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서로 서로 깊은 우정을 약속하였다면 그리고 인간의 말을 듣는 것보다 그 약속을 믿고 서로서로의 신발을 신고 걷는다면 바로 하나님의 우주적 세계는 바로 우리들 가운데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 원수들이 누리지 못하는 세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우주적 파장을 일으키는 자로 살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시작은 약속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가까이 있는 작은 자들과 약속을 하며 약속을 지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때 우주적 삶이 우리를 찾아 옵니다. 우주적 삶은 큰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자와의 약속을 지킴에서 오는 것입니다. 작은 자들의 그 모습 그 대로 사랑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바를 그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간질을 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지내는 모든 분들은 우리들의 이웃이요 므비보셋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 서로 므비보셋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보이지 않는 약속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Anthony De Mello의 “변화하지마”라는 글입니다.
“나는 수년간 노이로제가 걸렸었습니다. 불안했고 우울했습니다. 모두 나에게 내가 변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말이 싫었지만 동감했습니다. 나는 변화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나의 친한 친구들은 계속 나보고 변하라고 말합니다. 나는 무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누군가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변하지마. 나는 네 모습 이대로 사랑해.’ 이 말은 나에게 음악소리같이 들렸습니다. ‘변하지마. 변하지마. 변하지마. 네 모습 그대로 사랑해.’ 나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나는 활력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변화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함을 알 때 나는 변화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약속의 사람들은 이웃을 향하여 ‘변하지마’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변하여야 할 사람은 자신임을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이 때 우리 모두는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우주적 세계는 우리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로므로 우리 약속의 사람이 되십시다. 서로를 향하여 말하십시다. “변하지마.” 한편 내 자신이 변하여야 함을 인정하십시다. 이러한 약속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이들을 위하여 주님은 기쁘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함께 다윗의 고백에 동참하십시다.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