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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날짜 : 2007.06.0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성경본문 : 빌립보서 3장 1절-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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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투니에라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적당량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친분이 두터운 한 환자에게 함께 담배를 끊자고 제안합니다. 사실 자기를 위해서 보다는 환자를 위해서 제안한 것입니다. 환자가 꼭 금연을 해야할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몇년 뒤에 환자를 길에서 만났는데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담배 피우세요?” 물었더니 “한번도 끊은 적 없어요.” 대답합니다. 계속 말하기를, “저는 금방 담배피우는 것을 허용하는 의사 선생님을 찾았죠.”

저도 일년에 정기진단을 꼭 받곤 하는데 제가 목사인지 알면서도 의사는 늘 확인 하곤 합니다. “담배는 계속 안 피우죠?” 물론 저는 자신있게 안 피운다고 말합니다만 담배를 즐기시는 분들은 의사분들의 이런 질문에 늘 마음이 불편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아마 담배 없이는 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담배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는 의사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실 담배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더 드린다면 천주교는 담배에 대해서 전혀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물론 요즘 개신교도 많이 개방이 되긴했습니다만 아직도 천주교를 따라 가려면 먼 것 같습니다. 종종 한국 천주교인들 가운데 천주교를 택한 이유를 술과 담배에 있었다고 솔직히 말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오래 전 천주교인 가정의 장례예배에 참석하고 댁으로 가 보았더니 조문객들이 자연스럽게 술과 담배를 권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습니다. 제가 개신교에서는 술과 담배가 죄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개신교보다는 천주교가 훨씬 개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가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요즘 한국에서는 천주교가 어느 종교보다 많은 성장을 가져 왔다고 합니다. 물론 사회정의를 외치기에 많은 성장을 가져 왔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박용규 목사님이 제직 수련회에 오셔서 천주교의 괄목할만한 성장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신 통계를 다시 말씀드리면 1995년에서 2005년 십년 사이 개신교는 팔백칠십육만명에서 팔백육십이만명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곧 -1.6%의 성장 곧 실질적은 감소현상을 빚었습니다. 반면 천주교는 이백구십오만명에서 무려 오백십사만명으로 증가했습니다. 78%의 성장을 보였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천주교가 개신교를 앞지를 것 같습니다. 천주교와 경쟁하자는 것이 아니라 왜 천주교는 이처럼 성장했고 개신교는 성장하지 않고 도리어 감소했는지 심각하게 질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술 담배 때문일까요? 혹시 그것 때문에 크게 잡아서 5-6% 성장했을수 있었겠죠. 그러나 그 것 때문에 78%씩이나 성장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물론 하나님만 아실줄 압니다. 역사학자들도 완전히 파악하기는 불가능할줄 압니다. 78%성장 안에는 거품 성장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된 성장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들은 성장할수 있었을까요? 역사학자들은 많은 이론을 전개하겠지만 저는 오늘 본문 말씀가운데서 참된 교회의 성장이론을 찾아 보았습니다. 먼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사도 바울의 다음의 고백이 사도바울을 위대한 사도바울이 되게 하였고 또 많은 교회성장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10,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된 빕립보서는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쓴 옥중서한중 하나입니다. 감옥에서 쓴 편지이니 보통의 편지보다 더 흥미로운 아니면 호기심나는 내용이 기록되었으리라 우리는 쉽게 기대할수 있습니다. 아니면 쇼킹한 내용을 독자들은 기대하였을지 모릅니다. 빌립보교인들은 이 서신을 읽으면서 두 번 놀랐을 것입니다. 하나는 감옥에 있는 사도바울이 빌립보교우들을 향하여 도리어 ‘기뻐하라’ 노래하다시피 강조합니다. 감옥 밖에 편안하게 있는 자기들을 향하여 ‘기뻐하라’고 외치는 사도바울의 글을 보며 놀랬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 1절을 다시 봉독해 드리면,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이렇게 기뻐하라는 표현이 수없이 나옵니다.

감옥안에서 기뻐하는 모습으로 인해 놀라는 것이 조금 가라앉는듯 하는데 갑자기 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아니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이미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도 부족해서 더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고자 하니 너무도 깜짝 놀랄만한 고백입니다. 요즘 감옥에 갇히는 것 좋아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당시 감옥은 요즘 감옥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열악한 감옥입니다. 그런 감옥에 있으면 주님의 고난에 이미 참여할대로 참여한 것인데 사도바울은 그것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여러분도 그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는 ‘이 말씀은 성경에 없었으면’ 하는 말씀들이 한 두개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멘’ 해야 하는데 솔직히 이 내용을 잘 이해한다면 참으로 ‘아멘’하기 어려운 귀절입니다. 사도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더 깊은 고난을 사모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하는 자들을 통해서 초대교회는 성장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오늘도 참된 교회의 성장을 일으키는 자들은 바로 이러한 고백의 주인공들이지 않을까요? 고난과 참된 교회 성장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줄 압니다.

천주교가 그렇게도 성장했는데 그 이유는 술과 담배에 개방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분명히 사도바울의 고백에 동참하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의 이야기가 왜 고난의 삶이 중요한지 우리들에게 일깨워 줍니다.

황금빛 열매가 탐스럽게 달려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에는 두 개의 큰 가지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에는 죽음의 열매가, 다른 한 가지에는 생명의 열매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느 가지에 죽음의 열매가 달려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 열매를 따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라에 오랫동안 가뭄이 들었습니다. 모든 곡식과 초목이 말라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만은 건재했습니다. 오히려 황금빛 열매들이 다른 해보다 더 풍성하게 두 나뭇가지에 달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배가 고파 열매를 따먹고 싶었지만 누가 먼저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잘 못하다간 죽음의 열매를 먹을 수가 있기 때문이죠.

그런 어느 날, 한 사내가 나무 밑으로 다가가더니 열매 하나를 따서 눈을 꼭 감고 깨물어 먹어 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에게는 굶어 죽어가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먹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싶어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 보았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사내는 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오른쪽 나뭇가지에 달려들어 맛있게 열매를 다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따먹어도 열매는 죽지 않았습니다. 따먹는 즉시 그자리에 황금빛 열매가 또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죽음의 열매가 왼쪽 가지에 달린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중오의 눈으로 그 나뭇가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왼쪽 가지를 자르고 꺾고 분질렀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무는 죽어 있었습니다. 황금빛 열매들은 모두 땅에 떨어져 있었고, 메마른 이파리 하나가 시커멓게 시들어 있는 한쪽 남은 가지에 겨우 붙어 있었습니다.

황금빛 나무가 늘 황금빛 열매를 맺힐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죽음의 열매가 함께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꾸민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너무도 잘 비쳐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황금빛 열매를 원합니다. 죽음의 열매는 배척합니다. 아니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열매 없이는 황금빛 찬란한 열매도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런데 이 당시 골고다를 적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아직도 마르지 않았는데 벌써 십자가가 없는 부활을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벌써 죽음 없는 예수교가 판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2절서부터 봉독해 드리면,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할례당들은 한번의 고통으로 하나님을 섬기려했던 자들입니다. 할례의 단 한번의 고통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대신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주의하라고 사도바울은 권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사도바울도 육체적인 고난과 율법을 지킴으로서 오는 고난을 너무도 잘 알았고 잘 지켰던 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고난이었습니다. 고난처럼 보이는 고난이었습니다. 그것으로는 참 생명을 맛 볼수 없었습니다. 그는 생명을 맛보기 위해서 별짓을 다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교회도 핍박하였습니다. 율법에도 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황금빛 생명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황금빛 생명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황금빛 생명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황금빛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 안에는 두가지가 함께 있음을 보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사도바울도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율법을 흠이 없이 지킨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안에서 참 생명을 찾질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황금빛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할례처럼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미 감옥 안에서 고난에 동참하고 있으면서도 또 다시 새로운 고난에 동참할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지난 주에는 성령강림주일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 후인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2천년 전에 마가의 다락방에 내린 성령이 이제는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 임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왜 우리에게 임하셨을까요? 이제 남은 것은 매일 매일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 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임니다.

그런데 누가 진실로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아 갈수 있을까요? 누가 삶에서 부활의 열매를 많이 많이 맛보며 살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기 전에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지 않고 부활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옛날 유대인들이 할례만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린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행하는 것 같지만 참된 생명을 맛보지 못하고 살았던 율법주의자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요즘 처럼 쾌락주의가 판치는 이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다는 것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다음 이야기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주겠다고 모두 모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천사에게 달려 갔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이상하게도 ‘행복 바구니’와 함께 ‘불행 바구니’ 한 개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행복을 나누어 주겠다고 해 놓고 왜 불행을 나누어 주는 겁니까?”

두 바구니를 받아든 사람들이 천사에게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싫다면 모두 돌아 가십시오.”

이 이야기의 저자의 의도는 현대인들이 행복만을 추구하고 있는 어떻게 보면 쾌락주의자들임을 고발하는 것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행복만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황금 열매만을 좋아하는 행복추구자들입니다. 정말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자들입니다.

마음 곳 깊이로는 세상의 행복만을 추구하면서 겉으로는 율법의 준행자가 된다면 이 것이 바로 위선이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 신앙 생활 잘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늘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산다면 참 부활의 축복을 버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이 없나요?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 하나님께서 너무나 잘 아시기에 성령을 보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우리와 별다른 사람이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감옥안에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려고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힘이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사도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을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으려 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 때야 진실로 참된 부활을 체험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으십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것은 실지로 죽는 것입니다. 때로는 부상을 당하는 것입니다. 부상병이 되는 것입니다. 부상병이 되지 않고서는 죽을수 없습니다. 부상병이 되지 않고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수 없습니다.

지난주 월요일은 Memorial Day(현충일)을 지켰습니다. TV에서는 국립묘지가 많이 방영이 되었고 또한 국군 병원이 많이 방영이 되었습니다. 죽은 군인들과 부상당한 군인들에게 애도와 함께 위로를 보내는 하루였습니다.

현충일을 지낸 후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또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도 주님을 위해서 부상을 당하고 순교를 당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에 깊은 감동이 왔습니다. 아니 우리 크리스챤들이 그러한 죽으심에 동참 하였더라면 이러한 전쟁도 도발되지 않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교회는 부상자들의 모임입니다. 사회에 나가서 주님을 위해 살다가 부상을 당한 후 와서 함께 위로하고 치료하는 곳입니다. 성령의 뜨거운 치료제를 덧입는 곳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사회로 나가는 곳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을 위하여 부상당하십시다. 예수 때문에 욕도 먹으시고, 예수 때문에 가난해지시고, 예수 때문에 소외도 되시고, 예수 때문에 건강도 때로는 상하시고, 예수 때문에 세상 것도 잃으시고…. 그 때 여러분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것입니다. 부활의 주인공으로 살아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부상병들이니 서로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부활의 주인공들이니 서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영광받으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쉬운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기도만이 우리에게 부활의 체험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담대히 이 기도를 드리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프랑스 화가 르느와르는 말년에 루마티스로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가 붓 끝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그의 고통스러운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고, 어떤 때는 일어설 수가 없어서 꼼짝 못하고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르느와르는 미술사에 영원히 남을 만한 아름다운 걸작품들을 그려냈습니다. 그가 고통을 참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왜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일을 계속하는 건가?” 그러자 그는 땀을 흘리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고통은 지나가 버리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기 때문이네.”

사도바울도 이와 같은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들에게 함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영원에 동참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권능을 맛보는 길입니다. 부활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우리모두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도바울의 고백에 동참하십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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