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7.04.0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살려주는 영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5:35-49
한두번 말씀드렸습니다. 루터교목사님들은 부활절설교를 농담으로 시작한다고 합니다. 특히 마틴 루터는 천주교와 사이가 나빠서 그랬는지 루터교 목사들은 천주교를 천주교 신부들은 루터교회를 대상으로 서로서로 농담을 만들곤 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 믿음의 선조, 초대 한국교회의 신앙의 선배들이 만든 조크어린 이야기로 부활절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옛날에 야고보라는 선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이 헛되고 거짓됨을 알고서 세상을 버리고 사회에서 정해진 자리가 없이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청광’(맑게 미친 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시장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가 닭을 사서 주면서 이 닭을 우리 집에 좀 가져다 두게나 하였습니다. 그러자 야고보가 닭을 받아 가지고 그 사람의 무덤에 갖다 두었습니다. 그 사람이 집에 와 보니 닭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안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오늘 닭을 사서 야고보에게 주어 집에 갖다가 두라고 하였는데 닭을 가져 왔는가?” 집안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런일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생각합니다. “야고보가 정말 크게 미쳤구나. 그가 나를 속였다.”
나중에 길에서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내가 그 때 닭을 내 집에 갖다 두라고 했는데 그 닭을 어떻게 했는가?” 야고보가 대답합니다. “내가 즉시 네 집에 갖다 두었는데 어째서 내가 안 가져다 두었다는 것인가?”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되,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가보자.” 이에 야고보가 허락하고 함께 그 사람의 무덤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랬더니 과연 거기에 닭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 사람이 “내가 너에게 내 집에 가져다 두라고 했지, 내 무덤에 두라고 했느냐?” 야고보가 대답하기를, “이 무덤이 너의 본래 집이기 때문에 여기다 갖다 둔 것이다. 내가 어찌 너를 속였겠느냐? 네가 지금 거하는 집은 잠깐 동안 머무는 주막과 같을 뿐이고 무덤이 너의 본래 집이다.” 이에 그 사람이 ‘청광’의 지혜에 탄복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유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현실자체가 유우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닭을 무덤에 갖다 놓는 것은 놀라운 유우머입니다. 왜냐하면 죽음 앞에서 자기의 집을 운운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유우머이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복잡한 분석은 생략하고 이 이야기가 왜 부활의 사건은 유우머일수 밖에 없는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알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삶 자체를 냉철하게 살펴 보면 모든 것은 유우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유우머를 발견치 못하는 것은 우리가 현실을 제대로 관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현실 안에서 유머를 찾기를 즐겨했기에 놀라운 성공을 거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의 유일한 학교는 유머이다.” 아인슈타인은 어떤 때는 아주 쉬운 문제도 풀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간단한 유머와 웃음을 통해서 머리를 식히고 문제를 다시 풀어 나갔다고 합니다. 곧 하나님은 세상을 재미있게 만드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재미있는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을 바로 볼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아인슈타인이 그토록 놀라운 공헌을 한 이유도 그가 남달리 머리가 뛰어난 면 보다도 그는 세상을 재미있게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을 제대로 보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유우머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유머를 찾지 못한 것은 아직 그 현실을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세상을 유머의 관점에서 보려고 해도 죽음까지 유모의 관점에서 보긴 너무 어렵습니다.” 사실 죽음 까지 유머의 관점으로 볼수 있다면 정말로 멋진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죽음의 문제도 유우머로 풀수 있는가 질문이 생깁니다. 죽음의 문제에서까지 유우머를 발견하면 정말 온 세상은 유우머로 가득찼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아인슈타인보다도 더 멋진 그리고 많은 일을 이땅에 남기는 삶을 살게 될 줄 압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익히 알았는지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시작합니다. 35절 말씀입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이 당시 많은 교인들이 죽음에 대한 질문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먼저 “어리석은 자여” 라고 꾸짖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도바울은 좀 심한 것 같습니다. 부활에 대한 질문 할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곧바로 “어리석은 자여” 꾸짖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여튼
한마디로 사도바울은 죽음의 신비 내지 죽음 안에 스며 있는 유머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자들을 향하여 꾸짖는 것입니다. 죽음의 신비를 모르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야단 칩니다. 그리고는 왜 그들이 어리석은 자들인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곡식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36-38절 말씀입니다.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사도바울은 식물의 비유를 사용하면서 죽음 안에는 신비한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저의 집사람과 가까운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다가 함께 갈깔 웃은 적이 있습니다. 버들강아지가 나오는데 너무 예쁘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예쁘고 귀여운 나머지 웃어버렸습니다. 저희는 죽은 것 같아 보이는 나무에서 새로운 시작을 보면서 웃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처럼 웃기는 현상이 식물세계에 있는 것 같이 웃기는 현상이 죽음을 통해서 일어 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웃게 됩니다.
그러면 식물의 세계에 이런 신비가 있는데 동물의 세계를 어떠할까요? 아니 모든 사물에 놀라운 신비가 내재해 있음을39절이하에서 말씀합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결국 사도바울은 모든 것 안에 영광이 담겨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안에는 보이게 보이지 않게 영광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식물 동물뿐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영광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산 자에게는 보이는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영광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 숨겨져 있는 영광이 언제 꽃피우나요?
42절 이하 말씀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사도바울은 썩을 것 안에 썩지 않을 것이 담겨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욕된 것 안에 영광스러운 것이 담겨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약한 것 안에 강한 것이 담겨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죽음을 통해서 이루워집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버들강아지가 나무에서 눈뜨는 것도 재미있고 웃으웠는데 곧 썩을 것에서 썩을 것이 나오는 것도 재미있고 웃으웠는데 썩을 것에서 썩지 않을 것이 나올 때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약한 것에서 강한 것이 나올 때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나올 때 얼마나 웃읍고 재미있겠습니까? 이것이 사도바울이 보는 유머가 가득찬 죽음의 신비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아직도 의심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론은 좋은데 어떻게 부활의 사건이 우리 인간들에게 있을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죽은 듯한 식물에서 새로운 싹이 돋는 것으로 우리의 인간을 부활을 증명할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 새싹은 살아있는 나무에서 나오지 죽은 나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 철저한 신학자였던 사도바울은 이들의 질문을 너무도 잘 이해했습니다. 사실 식물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할수 있다면 온 인류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45절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사도바울은 구약의 말씀으로 돌아 갑니다. “기록된 바.” 창세기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바울이 말하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는 말씀은 곧 창세기에 나오는 이 말씀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생령’으로 소개 되어집니다. 바울은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비교합니다. 첫 사람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후 코에 바람을 불어 넣음으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것이 죽음을 맛 보아야할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둘째 아담의 모습입니다. 둘째 아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놀라운 선언입니다. 첫째 아담은 ‘ 산 영’ 그러나 둘째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째 아담인 예수님은 ‘산 영’으로 오셨다가 이제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살려주는 영이 되어 모든 사람을 살리는 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에 관해서는 좀 께름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에 관해서는 눈에 띄는 성서적 근거가 없습니다. ‘산 영’이란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만 ‘살려주는 영’이란 말은 구약에 나오지 않습니다. 창세기나 그 어디에서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구약에 부활의 사상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이 되신다고 표현된 데는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디서 감히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고 주장하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기에 부활을 안 믿는 자들에게 ‘어리석은 자’여 하고 야단칠까요?
본문말씀은 아니지만 고전 15:4-8절에 그 열쇠가 있다고 봅니다.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도바울은 보았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살려주는 영’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을 자기만 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만 보았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도들 모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곧 자기만 이 웃기는 사건을 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들 모두가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들 모두가 창세이래 최고의 웃기는 사건에 동참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 모두에게 나타났으니 이는 성경에 기록된 것이나 다름없는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는 가장 작은 사도이기에 자기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리 큰 사건은 못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도들을 포함해서 많은 자들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산 영’의 모습이 아니라 ‘살려주는 영’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사도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산 영’의 모습으로 오셨다가 죽음을 거치신 후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 이래로 가장 놀라운 일이고 신비한 사건이고 가장 웃기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예언의 완성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도 세상을 재미있게 창조하셨고, 완전한 재미있는 세상으로 이끌고 계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보았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활을 안 믿는 자들을 ‘어리석다’칭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령의 도움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 후로 부활을 믿는 것은 지혜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부활을 안 믿을 때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싶습니다.
그런데 더욱 웃기는 표현을 합니다. 4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만삭되지 못한 자기와 같은 자가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려주는 영’이 된다는 것입니다. 상상할수 없는 웃기는 사건입니다. 사도바울은 너무 기가 막히게 웃으워서 마루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어리석은 자여” 말하면서도 혼자서 킥킥되고 웃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비웃는 그 어리석은 자들도 자기처럼 언젠가 예수님처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사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이런 고백하지 않습니까? 뭔가 몸의 이상이 올 때나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 “살려만 주십시요.” 그럴 때 하나님은 웃으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살려주는 영으로 만들었는데 너의 목숨만을 살려 달라고…?”
교우 여러분, ‘산 영’인 우리도 언젠가 ‘살려주는 영’이 될 것입니다. ‘산 영’이셨던 예수님께서 ‘살려주는 영’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 믿을 때 최고로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교우여러분, 예수님은 최고의 유머의 주인공이십니다. 버들강아지가 나오는것보다도 비교가 안 되는 우우머의 주인공이십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들은 또한 주님을 이은 유우머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이 땅에서부터 ‘살려주는 영’이 되는 훈련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바로 온 세상 안에서 유우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쾌하게 웃는 것입니다. 어떤 일 가운데서도 웃음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아니 어떤 사건 안에도 반드시 웃음거리가 있음을 믿고 미리 웃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이미 이땅에서부터 “살려주는 영”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도 ‘살려주는 영’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웃으셔야 합니다. 목이 터져라 웃으셔야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부활의 주님처럼 ‘살려주는 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빌 킨(Bil Keane)이라는 만화작가가 있습니다. 그가 월남전에 참여한 군인들을 위문방문을 했을 때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방문했는데 두 다리를 잃고 가슴에 많은 부상을 당한 채 누워 있는 군인 옆을 지나고 있었을 때입니다. 군의관이 이 군인을 위해서 만화 하나를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킨(Keane)은 간단히 한장을 그려서 군인의 손에놓아 주었습니다. 천천히 눈을 올려 만화를 보더니 슬며시 웃으면서 “Thank you.” 나중 군의관이 말하길 이 것이 그가 표현한 첫번째 감정 표현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천천히 나아질 징조라고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만화작가는 죽음 안에 있는 신비한 웃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아니 죽은 자를 살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부활의 사람들은 웃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웃안에 웃음을 찾아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는 온 세상 그 어디에서나 웃음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웃음을 만들며 살아 갑시다. 우리는 살려주는 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사흘전 십자가에 달리셨고 이제 부활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