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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심장

날짜 : 2007.04.01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찢어진 심장
성경본문 : 마23:37-39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4-1-2007.wmv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3: 37-39)

일제시대 당시 일본이 한국뿐 아니라 동남아를 한 손에 쥐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한국은 그 당시는 조선이라고 불리웠지만 일본이 조선처럼 작은 나라를 점령하였던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상상이 안 가는 것은 그 작은 나라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였고 많은 피해를 중국에 안겨준 사실입니다.

제가 7년전 연변 희망촌을 방문하기 위하여 중국을 방문하였었는데 그 때 중국과 우리 한민족의 공통분모를 하나 발견했었습니다. 곳곳에 항일투쟁 용사들을 기념하는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나라 모두 항일 정신에 관하여서는 한 마음인 것 같습니다. 중국이 얼마나 일본인들에게 곤혹을 치루었는지 한눈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중 유명한 남경대학살 사건이 있습니다. 얼마 전 최근 중국인이 쓴 ‘남경대학살 시기의 미국 선교사’라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1938년 8월 13일 송후항전이 발발합니다. 이틀 후인15일부터 일본군은 남경을 폭격하기 시작합니다. 11월 12일 일본군은 상해를 점령후 즉시 남경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 중에 일본 군사당국은 남경에 남아 있는 모든 외국인은 철수하라고 일찍이 경고를 내립니다. 그러나 20여명의 서방인사들은 남경을 떠나지 않고 남경주민들을 돕습니다. 그 중 11명의 미국선교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내어 놓고 그 곳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 그들이 얼마나 남경주민들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 우리가 오히려 떠난다면 내가 보기에 이것은 우리의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한번의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경에는 대학살이 시작이 됩니다. 어느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옛날과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외국인은 여러 가지 일로 바빴는데 대다수는 부녀자들이 일본군인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방지하고 그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바빴다….”

한편 선교사들은 ‘안전구역’을 설정하여 중국난민들을 도왔습니다. 일본군인들은 선교사들로 인해 여러가지 방해를 받자 선교사들을 구타와 인격모욕 심지어는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선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경대학살은 진행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 곤경에 빠져 있는 난민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서방선교사들이었습니다. 교회대학 선교사의 주택 및 회사는 난민들이 피신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금릉대학과 금릉여자대학에는 각각 3만과 1만 이상의 난민이 몰려 왔습니다. 서방선교사들은 그들이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은인이었는데 어떤 분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몇명의 외국 선생이 한 곳에 오면 일반 난민들이 주위로 몰려 들었는데 마치 작은 새가 어미새를 본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방금 봉독해 드린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온 표현과 유사한 표현이 나옵니다. 물론 정반대의 내용이긴 하지만…. 사실 남경대학살 이전에는 서양인들을 ‘양키’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로는 ‘구세주’로 불리워 집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마칩니다.

“비록 그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지만 완전 무장을 하고 도처에서 학살을 감행하는 약 십만명의 일본군에 과감히 맞선 그들이 정의이자 공의와 인권의 승리자였다. 인류문명역사상 그들은 우리 후대인들에게 영원한 정신적 금자탑을 세웠으며 인류 미래의 방향을 이끌었던 것이다.”

많은 감동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쓴 중국인은 현재 남경사범대학에서 연구하는 학자인데 그는 확신하기를 이 선교사들을 통하여 인류의 미래의 역사가 밝히 이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경대학살사건은 도리어 놀라운 미래를 창조하는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종려 고난 주일로 지킵니다. 주님께서 나귀타시고 예루살렘에 오늘 입성하신 후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세상을 떠납니다. 2000년전 이번 주간에 예루살렘에서는 대학살사건이 벌어지는 주간이었습니다. 물론 선량한 시민 한 사람이 체포되고 로마법정에서 재판 받으시고 사형당하셨기에 대학살이라고 표현하기는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이 처형당한 사실을 인정하는 우리에게는 남경 대학살 사건보다도 더 흉칙한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학살과 남경대학살은 유사한 점이 있고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눈에 띄는 유사한 점은 두 사건 모두 인류역사의 놀라운 미래를 창조하는 역사의 한 페이지이 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학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온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한편 남경대학살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2000년 전의 모습을 재현하는 선교사들의 위대한 모험적 희생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을 통하여 2000년전의 사건은 또 다시 밝게 온세상에 비추워졌고 인류 역사는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또 다른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유사하지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고백합니다. 37절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는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여러번 모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끼들은 그 품을 거절했습니다. 반면 남경대학살 사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몇명의 외국 선생이 한 곳에 오면 일반 난민들이 주위로 몰려 들었는데 마치 작은 새가 어미새를 본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남경에서는 중국 난민들이 작은 새가 어미새에게 몰려오듯이 몰려 왔고 반면 예루살렘에서는 아무리 어미새가 새끼들을 안으려 해도 안을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비슷하지만 다른 점입니다. 다음의 이야기가 이 두 사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청년이 아름다운 한 아가씨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얼굴과는 다르게 아주 독한 마음을 가진 아가씨었습니다. 아가씨는 청년이 정말로 자기를 사랑하는지 확인해야 하겠다면서 청년에게 자기를 사랑한다면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어 자기 앞에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어 두 손에 들고 아가씨의 사랑을 얻게 된 기쁨에 들떠 아가씨가 있는 것으로 있는 힘껏 달음박질쳐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너무 서두른 나머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심장이 땅바닥에 툭 굴러 떨어졌습니다. 청년은 놀란 얼굴로 땅바닥에 떨어진 어머니의 심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심장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얘야 어디 다치지 않았니? 조심하거라.”

남경에서는 난민들이 선교사라는 어미새 품에 안겼습니다. 반면 예루살렘에서는 주민들이 어미새의 심장을 떼냈습니다. 그 때 어미새의 심장이 당신을 죽인 자들을 향하여 외치지 않았을까요?

“얘야 어디 다치지 않았니? 조심하거라.”

그런데 정말 그러했을까요?

금주까지 사순절을 지킵니다. 사순절 시작하면서 말씀드린대로 사순절은 40일간 무엇을 이루기 위하여 지키는 절기가 아닙니다. 40일간 얼마나 절제할수 있는지 자신을 테스트하는 기간이 아닙니다. 물론 가능한 한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참 목적은 사순절은 예수님의 깊어가는 고난에 동참하며 결국 예수를 더욱 잘 따르게 되기 위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가지고 사순절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우선 사순절은 우리가 예수님의 심장을 도려낸 자였음을 새로이 깨닫는 절기일줄 압니다. 예수님의 깊어 가는 고난의 절정은 인간들 아니 우리들에 의해서 심장을 도려냄을 당하는 고통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곧 우리는 어미새가 되어 안으려하시는 예수님께 안기기는 커녕 도리어 예수님의 심장을 빼어내어서 우리의 욕심대로 살으려 했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들의 이 흉칙한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이 모습을 깊게 느낀 분들은 실로 사순절을 아주 뜻 깊게 보내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분명히 들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온전한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배척받으시는 고통의 소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안고 또 안고 또 안으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인들은 주님의 품을 원치 않았습니다. 암탉의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겠습니까? 암탉이 알을 품고 몇일 동안 먹지도 않으면서 병아리가 되어 나오기 까지 기다리던 시간이 가장 고통스러울까요? 인간적인 표현으로 바꿔 보면 부모가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언제 일까요? 안으려 하는데 뿌리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엄마가 안아 주어야지 건강하게 잘 자라게 되어 있는데 아기가 엄마의 품을 뿌리친다면 엄마의 심정이 어떨까요? 그것은 마치 아이가 엄마의 심장을 도려 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이와 같이 이스라엘인들은 안으면 안을수록 예수님을 뿌리쳤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심장을 도려 내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을까요? “애야, 어디 다치지 않났니? 주심하거라.” 주님은 고통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아주 난해한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예수님은 마치 복수하시는 것 같습니다.

신학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 약 40년 후에 이스라엘이 로마에 완전히 함락되는데 바로 그 사건을 예언한다고 해석할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품을 거절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약 40년 후에 이루워집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이스라엘을 방문 했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게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예루살렘 성문입니다. 예루살렘 성문이 한쪽만 남아 있고 한쪽은 무너져 있었습니다. 안내인이 설명하기를 A.D.70년에 Titus로마 황제가 이스라엘을 함락시킨 후 입성을 하는데 황제의 마차가 성문보다 더 커서 어쩔수 없이 성문의 한쪽을 부수었다는 것입니다. 성문을 부순 후 유유히 마차를 타고 들어 온 것입니다. 오늘 종려주일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들어 오시는 것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는데 예수님께서 나귀 타고 들어 오신 후 약 40년 후에는 그 성문의 한쪽이 파괴되었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들어 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그러면 실제로 예수님은 “얘야 어디 다치지 않았니? 조심하거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도리어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9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또 다시 어려운 귀절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짧은 대신에 해석하기에는 많은 신학적 도움이 필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영영 보지 못할 것을 예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심판의 주님이 되어서 영광의 몸을 입고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뵙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아주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목사님 ‘얘야 어디 다치지 않았니? 조심하거라’와 주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은 전혀 연관이 안 되는 것 같은되요? 그러니 주님께서 심장을 내어 주신다는 말씀도 맞지 않는데요?” 맞습니다. 전혀 연관이 안 됩니다. “얘야 어디 다치지 않았니?”는 사랑의 내용입니다. 반면 주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의 내용은 심판의 내용입니다.

얼마전 기독교 신문에서 이정근 목사님의 ‘독설가(poisonous tongue)와 애설가(sweet tongue)’라는 제목의 재미있는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독설가는 입에 독이 품어 있는 사람을 말하고 애설가는 물론 그분이 만든 단어인데 입에 사랑이 담겨져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얼뜻 보면 독설가였습니다. 다시 한번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봉독해 드립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이 정도면 독설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정말로 주님은 독설가였을까요? 분명한 것은 심판의 말씀을 하시는 주님은 독설가였습니다. 왜 주님은 독설가가 되었을까요? 우리의 죄가 주님을 독설가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아니였더라면 주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우리들의 죄가 그 선하신 주님을 독설가가 되게 한 것입니다. 주님은 양과 같이 선한 애설가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죄가 주님을 독설가가 되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애설가의 심장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죄가 주님의 혀를 독설가의 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선언하신 것입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그런데 결국 주님은 이런 독을 내뿜으셨기 때문에 죽으십니다. 주님께서 뿜으신 독스러운 말들 때문에 유대인들은 주님을 로마군인들에게 넘깁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되십니다. 사실 이러한 독을 내뿜지 않으셨더라면 주님은 십자가형을 당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독설가이셨던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는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더 큰 심판의 말씀을 하실까요?

주님은 그 험한 십자가 상에서 일곱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가상칠언중 한 마디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복음서 전체에 기록된 가상칠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26,27)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28)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

바로 이 가상칠언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심장이 찢어지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가상칠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얘야 어디 다치니 않았니? 조심하거라”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심장이 찢어짐과 함께 당신이 애설가임을 보여주십니다. 심장이 터지는 고통을 안고 주님은 아름다운 가상7언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죄는 애설가이신 주님을 끝까지 독설가로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은 진실로 애설가이었음을 보여 주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는 그토록 독을 뿜으셨던 주님은 정작 십자가에서는 전혀 독을 뿜어내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본질적으로 애설가이시기 때문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는 애설가이신 주님을 독설가로 만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주님은 십자가형을 감당하셨습니다. 십자가형을 감당하시면서 또다시 애설가가 되셨습니다. “얘야 어디 다치니 않았니? 조심하거라.”

이번 주간 주님을 독설가로 만든 우리들의 모습을 깊게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끝까지 애설가의 모습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을 깊게 묵상하십시다. 찢어진 심장을 안고 우리를 행하여 외치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얘야 어디 다치니 않았니? 조심하거라.”

제가 어렸을 때 예수님이 수난에 관한 영화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제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로마 군인이 가시 면류관을 만들다가 먼저 자기가 가시에 찔렸습니다. 피가 흐르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군인은 피를 닥고 조심스럽게 가시면류관을 가지고 갑니다. 저는 오늘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 장면이 불현듯 떠 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인에게 무어라 하셨을까?

“얘야 어디 다치지 않았니? 조심하여라.”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손발에 목을 박을 때 도리어 자기에 손을 찧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셨을까요?

사실 예수님께 가시면류관을 씌운 자는 우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손발에 못을 박은 자도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손을 찧을 때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얘야 어디 다치지 않았니? 조심하거라.”

교우여러분 우리가 죄를 져서 고통가운데 있을 때마다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으시던가요? “조심하거라.”

남경의 선교사들이 왜 그렇게 위대한 삶을 살았을까요? 그들은 주님의 심장소리를 들은 자들입니다. 그들을 향한 주님의 심장 소리를 들은 자들입니다. 십자가상의 일곱마디 말씀을 들은 자들입니다. 자기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울러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결국 그 일곱마디 말씀은 자신들을 향한 말씀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 말씀은 그들의 가슴에 묘한 메아리로 울려 퍼진 것입니다. “얘야 다치지 않았니? 조심하거라.”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남경을 떠나도 끝까지 남아 있어서 중국 난민들을 위한 어미새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교사들은 평생 중국인들을 향하여 말했을 것입니다. 아니 당신들을 해치는 그 누구에게도 말했을 것입니다. “다치지 않았습니까? 조심하세요.” 이 마음을 갖고 평생을 중국에서 보냅니다.

교우 여러분, 이번 고난 주간 우리가 주님을 독설가가 되게 한 것을 깊이 회개하십시다. 아울러 주님을 더 이상 독설가가 되게 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십시다. 또한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심장이 찢어지면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다. 그리고 우리도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자들이 되십시다. “다치지 않았습니까? 조심하세요.”

말씀을 거둡니다.

불란서에 쟌 쥬강이라는 수녀가 있습니다. 47세에 자기집을 열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어느 시각장애자 할머니에게 자기의 침대를 내어 주고 자신은 다락에서 생활하기 시작합니다. 곧이어 두 번째 노인을 맞아 드림으로써 본격적인 자선사업을 시작합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새끼 새가 되어서 그의 주변으로 몰려 옵니다.

그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작은 사람이 되세요. 작은 자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왜 그가 작은 자가 되자고 했을까요? 작은 자들은 애설가인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입니다. 큰 자들은 반면 예수님을 독설가로 만드는 자들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큰 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독설가로 만들곤 하지 않았습니까? 큰 자들은 모든 것을 자기가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미의 품을 거절합니다.

반면 작은 자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작기에 어미의 품을 찾습니다. 어미의 심장 소리를 듣습니다. 사실 쟌 쥬강이 그토록 귀한 일을 할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미의 품을 찾았습니다. 주님의 품안에서 주님의 심장 소리를 들었습니다. “얘야 다치지 않았니 조심하거라.” 이 음성을 들었기에 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많은 어려운 자들의 어미새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는 어미새의 품이 필요한 작은 자들입니다. 그 품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찢어지는 주님의 심장 소리를 들으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26,27)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
“내가 목마르다”(요한복음 19:28)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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