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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

날짜 : 2007.03.25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그리스도의 몸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2장 12-27절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3-25-2007.wmv

캐서린 도헐티(Catherine Doherty)라는 수녀가 있습니다. 그 분은 천주교 자선기관을 만들어서 평생 많은 어려운 사람을 도왔습니다. 성녀에 가까운 분입니다. 80세가 가까이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이 자신의 모습을 고백합니다.

“내 안에는 세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번째 사람은 성녀와 같습니다. 늘 금욕하고 기도에 힘씁니다. 이 성녀가 자선기관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종교 서적을 썼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평생을 바쳤습니다.

“한편 또 다른 저의 모습이 있습니다. 저는 그를 캐서린(Catherine)이라고 부릅니다. 캐서린은 게으릅니다. 오랫 동안 목욕하기를 좋아합니다. 예쁜 옷을 좋아합니다. 화장을 좋아하고요. 맛있는 음식과 포도주를 즐깁니다. 캐서린은 남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성녀와 늘 다툽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작은 소녀가 있습니다. 언덕에서 뛰어 놀기를 즐겨하죠. 구름을 바라보며 공상에 잠기곤 한답니다. 신데렐라가 내 안에 늘 함께 살고 있답니다.

“저는 이 셋 중에 누구를 제일 좋아하냐구요? 나이가 들수록 성녀처럼 되는 느낌입니다. 아니 성녀가 되어가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사실 마음속으로는 캐서린이 더 되고 싶어하죠. 그렇지만 진짜 참 내 자신의 모습은요…, 언덕 위에서 공상에 잠기곤하는 작은 소녀랍니다. 신데렐라가 저의 참 모습이랍니다.”

도헐티(Doherty) 수녀는 80평생 이웃을 위해 살면서 늘 기도와 금욕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솔직하게 소개합니다. 현재 느끼는 것은 성녀인 자신이고, 되고 싶은 것은 게으른 캐서린이고 무엇보다도 참 자신의 모습은 언덕 위에서 공상을 하는 어린 아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제가 좋아하는 론 롤하이저(Ron Rolheiser)라는 분의 사순절 명상록에서 읽었습니다. 롤하이저가 자신의 사순절 명상록에서 이 글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순절은 참 자신의 모습을 느끼기 위한 절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강조하는 것은 캐서린 도헐티수녀에게 이처럼 세가지 모습이 얽혀져 있는데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라는 것일 줄 압니다. 사순절은 이처럼 자신 안에 있는 여러가지 모습을 만나는 절기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분의 글을 읽은 후 이분 안에 계신 예수님을 느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분안에 있는 성녀만 사랑하시고 계신 것이 아니고 게으른 캐서린을 사랑하고 계시고 더욱이 언덕위에서 공상을 즐기는 소녀를 사랑하고 계심을 느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사순절은 우리가 성자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얽혀있는 세 모습을 느끼는 기간인 것 같습니다. 혼동된 우리의 모습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들의 복잡한 이 모습을 사랑하시고 계신 주님을 만나는 절기인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복잡한 모습을 사랑하시는 주님이시다’ 생각을 하게 되니 더 마음 놓고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보면 볼수록 별나게도 복잡한 것이 우리들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하나님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어떤 때는 이웃을 참 사랑하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때는 그토록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때는 자신을 사랑하고 어린 아이처럼 마음이 쉽게 상하고 또 아주 별거 아닌 것가지고 좋아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느낍니다. 아마도 천의 마음을 갖고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우리도 모릅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완전한 혼잡함(mess)입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이것을 더 느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감사한 것은 주님도 혼잡함(mess)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래서 복잡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얼마 전 책방을 갔는데 저의 눈에 띄는 책제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Perfect Mess]. 부제로 ‘the hidden benefits of disorder(지저분한 것들의 숨은 선물)’라고 쓰어진 책이었습니다. 저는 뒤의 가격표를 보지도 않고 책을 집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늘 집사람에게 너무 어질러 놓는다고 잔소리를 듣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정리 정돈은 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알면서도 잘 안되는데 어떡합니까? 언젠가 정리(organize)를 잘 못하면 그만큼 시간 손해 에너지 소모가 많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소리는 지금까지 자주 자주 저를 괴롭힙니다.

이런 저에게 마음의 갈등을 풀어주는 책을 만난 것입니다. 그 책에서 제가 제일 좋아했던 챕더가 ‘messy home’입니다. 저자는 주장하기를 잘 정돈된 집보다 지저분(messy) 한 집을 더 사람들은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인간냄새를 많이 맡기 때문에…. 너무 잘 정돈된 집에 가면 더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손님들은 앞에서는 주인에게 깨끗하다고 칭찬은 잔뜩하지만 또다시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잘 정돈된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냄새를 그리워합니다. 저에게는 하나의 복음이었습니다.

가정만이 아닙니다. 그는 몇군데 사업체를 소개합니다. 공교롭게도 Boston 교외의 가게들을 소개합니다. Needham에 hardware가게가 있는데 Harvey’s Hardware라는 가게입니다. 가게 주인인 Harvey는 한국전에 참전한 사람입니다. 이 가게는 연평균 $2.5million어치의 상품을 판다고 합니다. 미국 전체의 평균은 90만불인 반면…, 그런데 이 가게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가게 안에 들어가보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주인 말고 찾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합니다. 지저분한 것 안에 숨은 선물이 있음을 보여주는 가게라고 합니다.

또 한 가게는 뉴튼(Newton)에 있는 New England Mobile Fair 책방입니다. 이 책방도 잘 정돈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Barnes and Noble 이나 Borders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올린다고 합니다. 역시 ‘지저분 한 것 안에 숨은 선물’을 개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일부터 당장 가셔서 온통 집과 가게를 뒤집어놓으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저분한 것 안의 숨은 선물’의 철학을 깨닫기 전에는 말입니다.

그러면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지저분한 것 안의 숨은 선물을 개발합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저도 이런 질문이 생겨서 책을 읽다가 제일 뒤 결론 부분을 들춰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결론을 안 내리고 책을 마감합니다. 두 사람이 저자인데 그중 한 사람은 Columbia 대학교 Business School교수입니다. 아마도 이들의 의도는 책 안에서 숨은 선물을 찾아내라는 뜻 같았습니다. 아니면 자기들도 모르겠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mess는 단순히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멧세지를 전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이 책을 금방 손에 들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말씀드린 것처럼 첫번째 이유는 저의 개인의 성향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제가 목사인데 최근 한국을 다녀 와보니 교회가 많이 혼란스러워졌음을 느끼곤 합니다. 한국 방문할 때마다 느끼곤 합니다. 이민교회도 계속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시간 그 것에 대하여 더 소개하지 않아도 될 줄 압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교인으로서 저 자신을 생각하며 교회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지저분한 것 안에 숨은 선물을 개발합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지저분한 인간 안에서 상상을 초월한 숨은 선물을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 합니다. 이 사람은 가장 지저분한 삶의 현장에서 가장 고귀한 분을 발견했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 선물을 발견한 사람은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만을 읽으면 뭐가 그렇게도 지저분한 인간세계인가 의혹을 품으실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만 보면 그런 느낌이 전혀 들수 없습니다. 몇 군데 눈에 띄는 귀절만 다시 봉독해 드릴까요? 먼저 첫 절과 마지막절을 봉독해 드립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27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한 몸이 되었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 20절 21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지저분한 인간 세계를 전혀 느낄수 없습니다. 시간 관계상 오늘 본문 말씀 전후는 봉독해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 전후를 살펴보면 좀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아주 비슷한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앞에 귀절인8-11절 중 몇절을 봉독해 드립니다.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이와 비슷한 내용이 오늘 본문말씀 바로 다음에 또 나옵니다. 28절부터 봉독해 드립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 오늘 본문 말씀 앞 뒤로 비슷한 말씀이 반복되어 나올까요? 옛날 성경은 파피루스(papyrus)라는 비싼 나뭇닢 곧 오늘의 종이에 기록을 했습니다. 이 처럼 비싼 종이에 다가 쓴다면 글자 하나하나가 곧 돈입니다. 그러므로 쓸데 없는 말은 써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말씀 전과 후에 비슷한 내용을 반복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바울은 질서를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는 많이 있었지만 질서가 문란한 교회였습니다. 질서가 문란한 교회에 하나님의 은사가 임하니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질서를 강조합니다. 왜 질서를 강조할까요? 한마디로 고린도교회는 혼잡(messy)한 교회였습니다. 사실 고린도 전서1장서부터 11장까지 고린도 교회의 혼잡한 상황을 사도바울은 자세히 기록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설교준비용으로 보는 성경은 문단 문단마다 제목이 붙여져 있는데 문단마다의 제목들만 읽어도 금방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음행에 대한 바울의 단죄’, ‘교우끼리 송사하지 말라,’ ‘음행의 죄’, 결혼문제,’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여자가 머리를 가려야 할 이유’…, 몇 가지 제목만 나열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으로 들어가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고린도 교회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체험했습니다. 특히 방언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본문말씀 전후에 방언의 은사는 다 나옵니다. 다른 은사는 한 쪽에만 나오는데 방언은 두 군데 다 나옵니다. 그것도 몇번씩이나 언급됩니다. 교회 안팎으로 많은 죄를 범하면서 교회 안에서는 방언을 한다하며 요란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이런 교우들에게 사도바울은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아니 이런 질서가 없는 고린도교회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실제로 이러한 혼잡한 교회에게 사도바울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절)

교회일만 열심히하고 사회일과 가정일을 등지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는 말씀입니다. 아니 이것은 약과입니다. 음행하는 교우에게도, 교우들끼리 재판을 거는 자들에게도, 집에서 밥을 안먹고 교회에 와서 밥먹느라고 성만찬을 망치는 교우들에게도, 방언을 하면서 자기가 최고의 신자인냥 떠들고 다니는 교우에게도 사도바울은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절)

어떻게 사도바울은 이럴수 있었을까요? 분명한 것은 사도바울은 지저분한 것 안에 숨은 선물을 볼줄 알았던 것같습니다. 아니 지저분한 것 안에서 숨은 선물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상으로 알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은 두 가지 눈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육안으로 보이는 시력입니다. 싸우는 모습, 음행하는 모습, 우상숭배하는 모습등 온갖 잡다한 모습이 보입니다. 차마 구역질이 나서 생각하기도 역겨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또다른 시력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싸워도 제 아무리 음행하여도 어떤 우상에게 절하여도 그들은 하나로 보입니다. 신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어느 하나도 소용 없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 다 귀합니다. 그런데 모두가 아름답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느덧 익숙한 실루엣이 그려집니다. 그리스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놀라운 것을 봅니다. 그 어느 훌륭한 교회를 생각할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얼마나 훌륭한 교회입니까? 그런데 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다가 그리스도의 실루엣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다가 그리스도의 실루엣을 보지 못했습니다. 가장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다가 사도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교우들, 싸우기를 잘하는 고린도 교우들, 요란한 고린도 교우들을 묵상하다가 그리스도의 실루엣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아주 신기한 시력의 소유자인 것 같습니다. 죄와 악으로 혼잡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시력을 소유한 분이셨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시력을 소유하게 되었을까요?

사도바울은 인간의 죄를 대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본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를 대할 때마다, 이웃의 죄를 대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의 음행의 죄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합니다. 서로서로 고소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찢겨진 그리스도의 몸을 묵상합니다. 우상숭배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면류관을 쓰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언제나 주님은 용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이웃의 죄를 대할 때마다 더 자신있게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파헤칩니다. 그는 마음껏 파 헤칠수가 있었습니다.

어느새 사도 바울은 가장 지저분한 교회 한 복판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순간 놀라운 체험을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먼저 없어져야 할 교회 곧 가장 지저분한 교회인 고린도 교회 교우님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남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음행의 죄를 지은 자와 이웃을 고소한 자와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과 방언한다하며 교회를 문란하게 하는 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서로서로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모든 교우님들의 영혼을 적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음행한 자들의 영혼안에 주님의 보혈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서로서로 고소하는 자들의 영혼에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피가 우상숭배를 하는 교우들의 죄를 씻고 있었습니다. 한 피가 고린도 교우님들의 영혼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바울도 깜짝 놀랐을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안에 흐르고 있는 주님의 피가 음행하는 교인, 우상숭배하는 교인들에게서 흘러 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말입니다. 곧 사도바울의 눈에는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을 것 입니다.“나는 저 사람과는 상종을 안 할 거야” 서로서로 으르렁 대는 두 사람 사이에 이미 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아마도 깔깔 웃으면서 서로 다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지금 선언하고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절)

결국 사도바울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신 예수님이 가장 지저분한 고린도교회 교인들 사이에서 신비스럽게 부활하신 것을 본 것입니다. 고린도 교우들이 바로 주님의 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 2000년전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들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안에 사도 바울은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고린도교회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절)

인간의 죄가 극에 달한 현장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분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핵폭탄에 대해서 우리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핵폭탄은 카톨릭 성당에 떨어졌었습니다. 물론 이 성당이 표적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원래 나가사키가 표적도 아니었습니다. 원자 폭탄은 다른 도시에 투하될 예정이었습니다. 짙은 구름에 가려 목표지점 조준이 불가능함에 따라 미군 조종사는 두번째 목표인 나가사키를 향해 기수를 돌린 것입니다. 그 때 기체에서 결함이 발견되었고 다급해진 상황에서 폭탄은 계획된 지점보다 훨씬 북쪽에 투하되었으며 성당바로 위에서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피해자 중 한 사람으로 방사선과 의사인 나가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아내를 이 때 투하된 원폭으로 인해 먼저 하나님께 보냅니다. 사실 본인은 이미 연구생활을 하다가 방사선에 많이 쬐여서 원자력병으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먼저 죽을줄 알았는데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부인은 성당에 있었고 본인은 병원에서 일하다가 다행이 목숨은 잃지 않습니다.

사실 이분은 부인으로 인해 예수를 영접하게 된 분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후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적인 삶을 삽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깊이 명상하는 삶을 삽니다. 사실 그가 가장 깊은 명상을 한 곳은 공교롭게도 핵폭탄이 앗아간 황무지에서 였습니다. 곧 버섯 구름으로 황무지가 된 벌판을 걸으며 깊은 명상에 잠기곤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핵 황무지를 하나님과 함께 걷는 동안 하나님과 깊은 친교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장 황폐된 곳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한 나가이 의사는 아주 흥미로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버섯구름을 소재로 두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나는 버섯구름을 타고 성모마리아가 승천하는 그림입니다. 또 하나는 버섯구름을 타고 자기의 아내 미도리가 승천하는 그림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요. 사실 저는 책에 있는 그 그림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자기의 아내가 버섯구름으로 인해 세상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데 그는 자기의 아내가 버섯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릴수 있었을까요? 그는 버섯구름 밑에서 명상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명상했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흉칙한 곳에서 그리스도를 묵상했습니다. 어느새 버섯구름은 놀라운 축복으로 뒤 바뀌어진 것입니다. 그 버섯 구름을 타고 성모마리아가 승천하였고 자기의 부인이 승천하였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명상함으로 새로운 시력의 소유자가 된 것이니다. 그 시력을 통해서 자기의 부인은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고 죄와 공포의 상징인 버섯구름도 그를 승천케 하는 도구로 변할수 밖에 없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할 때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선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시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가장 지저분한 곳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것이 사순절의 축복입니다. 나가이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다가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공포의 버섯구름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의 구름이었음을 느낍니다. 버섯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부인을 보게 된것입니다. 나가이는 놀라운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다가 놀라운 은혜를 받습니다. 지저분한 고린도 교회가 바로 예수님의 몸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저자는 남은 사순절 기간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십시다. 놀라운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장 추하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 담겨져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가장 추한 곳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가장 추한 곳 곧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추한 곳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의 피는 지금도 가장 추한 곳을 깊게 흐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추한 죄인들을 당신의 몸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추하다고 여기고 있는 그 사람, 그곳에 주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피는 내 안에도 흐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갈보리 산에서 돌아갔습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einer Maria Rilke)가 세잔느의 작품을 처음 접한 후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을 보내면서 그 그림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그의 그림을 처음 접하고 당황함과 불안감에 잡혀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보는 눈이 생겼다.”

릴케와 같은 예술인도 세쟌느의 그림을 보는 시력을 얻기 위해서 오랜 시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력도 매한 가지 아닐까요? 그런데 언제 바로 보는 눈이 생길까요? 골고다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노라면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또 본다면 어느 순간 우리들에게 사람을 바로 보는 눈 이웃을 바로 보는 눈 교회를 바로 보는 눈이 생깁니다.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그리스도의 실루엣을 볼 것입니다.

아울러 가장 추한 우리 안에 흐르는 주님의 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피는 온 이웃의 영혼을 적시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 그리스도의 실루엣을 본 사도바울의 고백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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