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7.02.0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죽도록 충성하라
성경본문 : 요한계시록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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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기로 소문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 날도 역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밭으로 일하러 가고, 그 게으른 농부만이 텅 빈 집에 남아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른한 오후, 언제나처럼 대청 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소린가 싶어 농부는 게슴츠레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환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간 큰 도둑이 담을 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농부가 잠결에 들은 소리는 바로 도둑이 낡은 담장을 타 넘으면서 떨어뜨린 벽돌 소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도둑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농부는 다시 스스로 잠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어어, 도둑이네… 저놈, 담장을 넘어 마당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중얼거리며 말합니다. 그런데 이내 다시 “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농부가 다시 힘겹게 졸린 눈을 떠보니 도둑이 담에서 뛰어내려 마당을 살금살금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다시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며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집안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농부가 깊이 잠든 줄로 안 도둑은 살금살금 집안으로 들어와 농부의 옆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농부는 잠에 취한 채 속으로만 중얼거렸습니다. “저놈이 안방으로 들어가네…. 뭘 가지고 나오기만 해봐라!” 얼마 후 도둑은 안방에서 값이 나갈 만한 물건들을 한 보따리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대문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갔습니다. 게으른 집주인은 대문을 열고 나가는 도둑의 뒷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잠꼬대처럼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이놈, 다시 오기만 해봐라!”
우리들 속에 깊게 숨겨진 모습을 꼬집는 어떻게 보면 재미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정신을 바싹 들게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이 농부는 낮잠을 자면서 자신의 게으름을 괴로워 하고 있었을줄 압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분들은 “나는 안 그렇지” 생각하시며 자신의 부지런함에 자부심을 느끼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게으름은 자신의 게으름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음의 이야기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줍니다.
신발을 만드는 회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아프리카에 진출하는 사업 아이디어를 놓고 고심하다가 2명의 사람을 아프리카로 보냈습니다. 그들에게 아프리카의 시장성을 타진해 보라고 한 것입니다. 얼마 후 그들은 돌아와 판이하게 다른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한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신발을 신지 않고 다니므로 신발을 만들어도 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의견을 냈고, 다른 한 사람은 “아무도 신발을 신은 사람이 없습니다. 시장성이 무궁무진합니다”라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왜 이들이 이처럼 다른 보고서를 제출했겠습니까? 첫 번째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열심히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까지 갔지만 본성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게으른 눈으로 보니 도저히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부정적인 보고서를 열심히 써서 제출합니다. ‘반면 두 번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아무도 신발을 신고 있지 않으니 자기 회사원들이 가서 신발을 신겨주고 신발 신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땀을 흘리며 보여 주면 결국 모두가 100% 주민들이 신발을 신게 될 것을 내다 보았습니다. 없었던 시장이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고한 것입니다.
이 두 사람 모두 겉으로 보기엔 똑같이 열심히 일한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아프리카까지 갔고 또 열심히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전자는 바로 도둑이 나가는 것을 보고 “이놈, 다시 오기만 해바라…”하는 게으른 농부와 별 차이가 없을 줄 압니다.
오늘 제직 임직 예배로 드립니다. 제직임직예배 설교를 하는데 게으름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자신의 게으름을 아는 것이 부지런함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사실 게으른 농부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다음 번에, 다음 번에’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아니면 열심히 산다고는 하지만 부정적인 보고서를 쓰는 우리가 아닙니까? 우리 안에 있는 이 모습을 한번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습을 우리가 느낄 때 우리는 참 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시작할 줄 압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훌륭한 제직이 되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요한을 통해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보내는 말씀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 하기를”로부터 시작됩니다. 서머나 교회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7개 소아시아에 흩어진 초대교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금방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그 편지는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이지 우리 교회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 않습니까?” 11절에 이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곧 온 세상 모든 교회는 이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교훈이 적용되어 진 것입니다.
오늘 제직 임직 예배를 맞이해서 우리는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바로 우리 교회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 드릴 때 큰 은혜가 넘칠 줄 압니다. 먼저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서머나 교회에게 소개합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8절)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죽었다가 부활하신 이가 친히 지금 서머나 교회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서머나 교회를 통해서 저희 교회를 포함한 온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사도 요한은 놀라운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곧 부활의 능력의 주님이 교회에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모든 교회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 부활의 능력이 존재합니다. 서머나 교회에 존재했던 그 능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교회안에 있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게으른 자들입니다.
어떤 분은 ‘과연 그럴까’ ‘과연 우리 교회 안에 부활의 능력이 존재할까?’ 의문을 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계시기에는 너무 부족한 면을 많이 느끼시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서머나 교회 교우들도 그런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문을 품고 있는 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9절)
서머나 교인들은 자기들이 당하는 환난과 궁핍으로 인해 부활의 주님의 능력은 자기들을 떠난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게으른 자들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것을 핑계로 늘 쉽게 절망하고 충성을 다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들도 부활의 주님은 당신들이 겪는 환난을 전혀 느끼시지도, 보시지도 못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주님은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들을 늘 괴롭히고 있었던 유대인 그룹에 대해서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몇년전 목회자 conference에서 어느 목사님이 현재 당신 교회에 갑자기 암환자가 늘었다면서 걱정하며 기도 제목으로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암환자들이 많으니 주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시는 교회라는 불안감이 교인들 마음에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시지 않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 것을 계기로 교우님들이 교회 일에서 손을 놓을까 걱정하였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교우님들이 게을러지지나 않으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서머나 교인들과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어려운 일이 있을 수록 부활의 주님은 더 가까이 계심을 주님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서머나 교인들은 부활의 주님은 그동안도 보이지 않게 함께 계셨음을 깨닫습니다. ‘아, 우리의 고난을 부활의 주님께서 잘 아시고 계시는구나. 그러면 이제부터 서머나 교인들은 부지런한 교우들이 되었을까요? 그 한인교회분들이 주님의 함께 하심을 믿은 후 곧 충성된 교우가 되었을까요?
서머나 교우들에게는 또 다른 핑계거리가 생겼습니다.
게으름이라는 것이 쉽게 사라집니까? 게으름은 늘 얼굴을 바꾸어서 새롭게 변장합니다. 작심삼일이란 말이 괜히 생겨났겠습니까? 아무리 결심해도 결심이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게으름은 늘 기가 막힌 이유를 창조합니다. 2007년도 한 달이 지났는데 지금은 우리들의 결심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게으름만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습니까?
서머나 교인들은 아마도 고난 중에 부활의 주님이 함께 계신 것은 좋은데 고난의 끝이 안 보인다고 핑계를 대는 자들이 생긴 것 같습니다. 고난의 끝이 안 보인다는 이유를 가지고 또 게으름의 본성을 들어 내려고 합니다. 게으름의 얼굴 모양이 바뀐 것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셨던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10절)
십일 동안 환난을 받는 다는 것 외에 위로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 교인들이 받을 고난은 10일 동안으로 국한되어 있음을 밝혀 주십니다. ‘십일 동안’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만 가장 무난한 것은 그 고난은 부활의 능력의 주님 안에 갇혀져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소유한 자들이면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당할 고난은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이길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 만을 의지하면 가뿐히 이길 수 있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걱정했던 고난의 문제는 한시름 놓았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은 찬란한 면류관을 보여 주셨을 것입니다.
서머나 교우들은 놀라운 축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부활의 능력이 서머나 교회에 단순히 거하는 것이 아니라 서머나 교우들이 부활의 꽃이 됨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의 면류관으로 삼으신다는 것은 하늘의 천사중 그 누가 부활하신 주님께 와서 “성자여 왜 당신은 십자가에 달리셨오? 무엇을 얻으셨오? 무엇이 당신의 자랑거리요?” 물으신다면 주님은 서머나 교우들을 가리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자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자랑거리가 될만한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곧 예수님의 부활의 수고로 이루워진 최고의 상인 것입니다. 이 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 타이거 우즈가 Buick Invitational Golf 회에 우승을 함으로써 7연속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기록은 Nelson이라는 선수가 세웠던 11 연속 우승 기록인데 그것은 호랑이 담배 필적에 세운 기록입니다. 현대 골프에서 7번씩 우승한다는 것은 거의 조금 과장한다면 초인적인 능력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이거 우즈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가서 말했다고 합니다. “Make me tough(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세요).” 아버지는 거친 훈련을 시켰습니다. 우즈는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 아는 고통의 시간들을 이겨냅니다. 그 결과 오늘날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타이거 우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2등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50등, 100등을 하면 했지, 2등은 싫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을 꽉 사로잡는 것은 우승컵입니다. 그는 게임에 임할 때마다 우승컵에 빨려 들어 간듯 경기에 임합니다. 그리고 그 우승컵을 위해서 피를 말리면서 자신을 훈련시켜왔고 또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앞에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타이거 우즈가 소유하고 있는 수많은 우승컵과는 비교가 안되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엘리자베스 엘리옽(Elizabeth Elliot) 이라는 분인 [Discipline(훈련)]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대학교 학장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학장님이 학교에서 가장 행복한 학생은 음악 전공 학생들과 운동 선수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까, “Because they are disciplined. 그들은 훈련 받기를 자원했죠.”라고 말합니다.
음악인들과 선수들은 선생님들과 코치 밑에서 순종할 것을 자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원이 도리어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있고 그래서 가장 재미있게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타이거 우즈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골프선수이면서도 코치의 지시에 따라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는 두 가지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삽니다. 왜냐하면 그는 훈련을 받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자유한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가장 많은 우승컾의 소유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정말 죽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남들은 모르는 충성, 주님만 아시는 외로운 충성을 뜻합니다. 주님과 나만이 아는 훈련과 고난을 뜻합니다. 주님만이 아는 고통과 훈련의 시간을 많이 소유한 자가 진실로 죽도록 충성된 자들입니다. 그들이 진실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만이 아는 고난이 없는 자들은 열심인 것처럼 보이나 게으른 자들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의 감격을 잃은 자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은 타이거 우즈보다 더 큰 축복을 받는 길을 우리를 위해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죽도록 충성할 때 최고의 자유를 누리며 가장 행복하게 삽니다. 아울러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주님의 최고의 자랑거리가 됩니다.
교우 여러분 제직 여러분, 주님과 나만이 아는 훈련과 고난을 소유한 자가 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 보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번 설교 준비를 위해서 김남준 목사님의 ‘게으름’이라는 책을 많이 참고 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김남준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의 일입니다. 교역자 회의를 하던 중 한 교역자가 심방을 안 하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연로하신 담임 목사님은 낮은 어조이지만 침통한 목소리로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그 교역자를 나무랐습니다. 이윽고 교역자 회의가 끝나고 모두들 자리를 떠나는데, 담임 목사님만이 유독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살펴보니 그 분은 슬픈 기색으로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계셨습니다. “저렇게 게으르게 살다가 주님을 어떻게 만날꼬. 저렇게 나태하게 일하다가 무슨 면목으로 우리 주님을 뵈오려고.” 가슴 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드신 그 분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지 않으실까요? 눈물을 흘리고 계셨는데 갑자기 사도 요한이 주님을 우리에게 소개하십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8절)
이에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흘리시던 눈물을 훔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