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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리라

날짜 : 2007.01.28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나를 만나리라
성경본문 : 예레미야 29:1-14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1-28-200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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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어두워질 때까지 놀다가 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엄마는 걱정하며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말합니다. “밤 늦게까지 놀다가 돌아오면 숲을 지날 때 유령이 나와서 잡아가” 아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그 이후로 늘 어둡기 전에 집에 돌아오곤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입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밤에 심부름을 시켜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우유를 사오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못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유령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현명하고 믿음이 돈독한 엄마는 아들에게 성자의 메달을 주면서 이 메달을 갖고 있으면 안전하다고 말해줍니다. 아들은 메달을 들고 밖을 나섰습니다. 아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메달을 손에 들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이 이야기의 저자인 안토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아이는 두가지 두려움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유령에 대한 두려움이요, 또 하나는 메달을 잊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안토니 드 멜로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참 종교와 거짓 종교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거짓 종교는 이 이야기처럼 두려움을 줌으로써 인간을 꼼짝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통해서 인간을 묶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요즘 TV에서 인기있는 Dr. Phil이라는 분이 현대인들을 잘 분석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인생은 선택인데 현대인들은 삶의 80%를 두려움으로 인한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선택이 아니라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거짓종교의 희생자들이라는 뜻일줄 압니다.

오늘 벌써 2007년도 1월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1월이 다 지나갔습니다. 한달을 지난 지금 한번 뒤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큰 희망과 기쁨을 안고 맞이했던 2007년도, 그 첫 한 달을 어떻게 보냈는가? 혹시 두려움 가운데 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그 두려움으로 인해 삶의 중요한 결정을 하시진 않았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참 종교를 소유한 자들이 아닐 줄 압니다. 거짓 종교의 소유자들일 줄 압니다.

그런데 이미 지난 한 달은 어쩔 수 없고 이제 나머지 11개월을 참 종교인답게 멋지게 살아야 할 줄 압니다. 그러면 참 종교인답게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레미야의 편지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진 예레미야의 편지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겨 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내었는데 (1절)”

편지의 첫 서두는 4절 말씀에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4절)”

자 생각해 보십시다. 바벨론에 막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런데 잡혀 가자마자 예레미야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편지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메세지 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편지를 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기들은 하나님의 택한 민족인데 지금 바벨론으로 잡혀왔습니다. 포로 현장에서 하나님의 메세지를 접하니 모두 마음이 두근두근 거렸을 것입니다. 모두들 큰 기대감에 가득 찼을 것입니다.

저의 군복무 시절 이야기를 잠깐 할까요? 저는 군의관으로서 편한 군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편해도 그렇지 사회 생활보다 좋았겠습니까? 장교 숙소에서 생활하며 좁은 부대 안에서 일주일 내내 지냈어야 했습니다. 가끔 지휘관인 대대장이 저를 부른다고 하면 대대장에게 달려 가면서 한가지 기대가 언제나 저의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휴가 보내 주시려나?” 그런데 그런 행운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대대장이 부를 때마다 그 행운을 바라며 대대장실로 달려 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포로 현장에 도착했는데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긴 편지가 도착한 것입니다. 큰 기대를 안고 편지를 열어봅니다. 5절부터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5-7절)”

이스라엘 민족이 기대했던 말씀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아마도 ‘내가 빨리 가서 구해주실테니 잠깐만 참고 있으라’는 메세지였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다음 8, 9절이 증명해 줍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 선지자들에게와 복술에게 혹하지 말며 너희가 꾼 바 꿈도 신청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8, 9절)”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이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은 포로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대표적인 선지자가 28장에 나오는 하나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냐 선지와 같은 선지자들의 말을 듣길 원했습니다. 금방 포로 생활에서 해방될 것을 예언하는 말씀을 들길 원했습니다. 이 당시 이러한 가짜 예언이 판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행여나의 기대를 안고 편지를 열어 보았는데 고작 하시는 말씀은,

“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5절)”

포로 생활 속에 깊이 잠기라는 말씀입니다. 모두들 실망하고 있는데, 편지는 계속 읽혀집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10절)”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느덧 실망은 절망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은 냉혹하게도70년 포로 생활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10살난 아이가 이 말씀을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이는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70년이 지나면 나이 80인데 젊은 시절을 포로가 되어서 한 평생을 보내야겠구나….” 40 난 사람은 생각할 것입니다. “70년이 지나면 110살,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텐데…. 우리 자녀와 손자, 손녀들이나 고국으로 돌아가겠군….” 앞이 캄캄해 집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왔다고 해서 큰 기대를 가졌었는데 남은 것은 절망입니다. 절망중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편지는 계속 읽혀집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11절)”

이스라엘 민족의 뇌리를 치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70년 간의 포로 생활을 생각하며 낙담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절망적인 70년의 포로 생활이 도리어 이스라엘의 소망임을 선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어리둥절해 집니다. 그들은 처음으로 절망적 사건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이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절망적인 사건을 소망적인 사건으로 불 수 있는 안목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선포합니다. 절망이 절망이 아니고, 재앙이 재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망이 바로 소망이고 재앙이 바로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목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종교입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참 종교인이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안목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절망을 소망으로 보는 안목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재앙적 사건 안에서 놀라운 평안을 느끼는 축복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어느 비가 많이 내린 봄이었습니다. 어느 분이 농부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올 봄에 비가 많이 오니 올해는 풍년이 들겠네요.” 농부가 대답합니다. “아니죠. 비가 많이 오면, 농작물들이 뿌리를 땅 속 깊게 내리지 않죠. 땅 표면에만 뿌리가 멈추어 있게 되죠. 폭풍이 오면 농작물은 쉽게 피해를 받죠. 반면 여건이 안 좋으면 농작물은 뿌리를 깊게 내려 물을 얻으려하죠. 폭풍이나 가뭄이 와도 잘 견디어 낸답니다. ”

저희 집앞에 몇년 전 작은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해 가뭄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나무는 죽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무성해 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뭄으로 인해 뿌리가 깊게 내려졌던 것입니다.

농부는 일반인들이 갖고 있지 않은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농작물에게 비는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농부는 가뭄을 절망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소망이요 평안으로 보고 있습니다. 농부는 가무는 땅을 보면서 평안을 노래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니,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지 않을까요?

교우여러분,

2007년도 1월을 보내고 어떤 느낌이십니까? 이른 봄에 비가 촉촉히 내리듯 풍성한 한 달이었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아니면, 큰 기대를 안고 시작했지만 ‘올해도 별 수 없구나, 또 가뭄이구나’ 하는 생각이십니까? 가뭄이 어려움이 우리의 삶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는 축복이었음을 믿으십시다. 이 것이 새해를 한달 보낸 우리를 향한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절망 속에서 소망적인 사건을 만나는 안목을 주시고 계십니다. 재앙 안에서 평안의 축복을 만끽하는 삶의 자세를 주시고 계십니다. 가뭄과 재앙을 눈 앞에 두고 감사하는 자가 됩니다. 도리어 춤을 추는 자가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입니까? 이 선물만 있으면 2007년도 너무도 멋지게 살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2007년도 두려움이 우리를 주관하는 한 해로 만들지 마십시다. 도리어 소망 안에서 감사의 춤을 추는 한 해로 삼으십시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삶, 춤을 추는 삶을 누리십시다.

그런데 이 선물을 아무나 다 누릴 수 있을까요? 경험적으로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누릴까요?

12, 1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12, 13절)”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또 찾는 자들에게 이러한 선물이 주어집니다. 이 들은 곧 가뭄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가뭄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은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언제나 누립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이끌려서 삶의 중요한 결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찾아 삶의 결단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삶을 멈출 때, 가뭄 가운데서 십자가의 주님 앞에 서는 것을 멈출 때 우리는 이 놀라운 선물을 잃어 버립니다. 아니, 누리지 못합니다. 머릿 속으로는 알지만 삶 속에서 누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절망적 사건 안에서 소망을 찾으려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만이 십자가의 주님 앞에 서는 자들만이 이 놀라운 선물을 누립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그후로 70년을 하나님을 찾고 또 찾으며 보람있게 보내게 됩니다. 1년, 1년을 깊게 뿌리를 내리는 시간으로 삼습니다. 그 어느때 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만납니다. 자기 자신 안에 주어진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들을 재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최고의 민족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미래의 자기의 민족의 모습을 느껴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14절) ”

그들은 멀리 포로 생활하면서 마치 본국에 이미 돌아온 것과 같은 흥분을 안고 하루 하루 살아갑니다. 1년, 1년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민족이 된 것입니다. 도리어 역경 가운데서 춤추는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재앙의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실로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 되어간 것입니다.

어제 쉐마의 밤에 자녀들을 축복하면서 나눈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우리 자녀들이 다윗처럼 되길 원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다윗되게 한 사건은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 훨씬 전에 이루어집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역경가운데 자주자주 거했습니다. 빈들에서 사자와 곰을 만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찾는 법을 배웠습니다. 역경이 재앙이 아니라 축복인것을 너무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다윗이 되어 간 것입니다. 그는 끝내 골리앗을 물리치는 용사가 되었습니다.

전세계의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는 미키 마우스를 그린 월트 디즈니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아실 줄 압니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가 왜 그토록 창조적 삶을 살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월트 디즈니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동물 농장에서 살았는데 늘 동물들을 그렸습니다. 그는 예술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처음 광고 회사에서 일하면서 겨우 먹고 살 정도였습니다. 부도가 나는 광고 회사라 환경이 열악한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쥐들이 들끊는 사무실이었습니다. 디즈니는 쥐를 잡아 죽이지 않고 도리어 쥐장을 만들어 함께 지냅니다. 10마리 중 한마리는 디즈니와 사이가 좋아졌습니다. 그 쥐의 이름을 Mortimer로 부릅니다.

회사는 부도가 나서 디즈니는 Hollywood로 떠납니다. 떠나기 전 쥐들을 들에 풀어줍니다. 아홉마리 쥐는 잡초 사이로 사라지는데, Mortimer는 끝까지 디즈니를 바라봅니다.

얼마후 디즈니는 이 도시 저 도시 옮게 다니던 중 갑자기 그의 뇌리를 무엇인가 사로잡습니다. Mortimer 쥐가 떠올랐습니다. Mortimer 를 주인공으로 만화 영화를 제작합니다. 후에 Mortimer라는 이름 보다는 Mickey가 좋다하여서 Mickey Mouse 로 이름을 바꿉니다. 드디어 스타가 탄생했으며 Walt Disney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어려울 때 누추한 사무실에서 만난 쥐 한마리였습니다. 역경과 실패의 상징인 쥐가 바로 성공과 영광의 상징으로 바뀐 것입니다.

월트 디즈니는 역경 가운데 만난 쥐 안에서 소망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남들이 갖고 있지 않았던 안목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멋진 삶의 창조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안목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우리는 역경 가운데 소망을 갖게 됩니다. 인생의 가뭄 가운데서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 보게 될 때 이러한 안목이 생깁니다. Mortimer 가 Mickey로 변화는 안목을 갖게 됩니다.

교우여러분,

2007년도 우리에게 Rose garden이 약속된 것이 아닙니다. Mortimer라는 쥐가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찾으십시다. 찾고 또 찾으십시다. Mortimer 안에 Mickey를 보는 안목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함께 소망을 갖고 남은 11개월을 힘차게 살아가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우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춤의 제사를 기쁘시게 받으시고,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감당하기 어려운 고지서가 날라와도, 병마가 찾아 와도, 자녀문제로 골머리를 썩어도…,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함 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다. 기도의 마지막은 감사의 제사로 마치십시다. 일상 생활에서는 춤의 제사를 드리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2-3년 전 남미 어느 지역에 태풍이 강타했습니다. 가난한 주민들이 더 가난해 졌습니다. 그때 CNN 에서 그곳 상황을 보도하는 장면을 TV로 보게 되었습니다. 한 여인이 무너진 집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두가지 반응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통곡하는 것이고, 하나는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그 여인의 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더 멋진 집을 소유한 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아니, 더 멋진 집을 소유하지 못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여인은 그 시간 최고의 삶을 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그 삶은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그 여인의 삶 속에 그 순간의 춤은 계속 살아 남아 있게 됩니다. 최소한 그 여인의 춤은 저의 삶안에 살아서 새로운 창조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종교인이 되도록 오늘도 저를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이 참 종교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오늘 이 세상이 필요한 사람들은 단비를 맞으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뭄 가운데 춤을 출줄 아는 자들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 이 세상이 필요한 사람들은 단비를 맞으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뭄 가운데 춤을 출 줄 아는 자들입니다.

교우여러분, 2007년도 힘차게 살아가십시다. 두려움이 가득찬 이 세상은 우리들의 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가뭄 가운데서 십자가 앞에 서는 자들은 이 세상 어디서도 춤추는 자들이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온 세상의 가뭄을 맛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들은 감사의 춤을 추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온 세상의 가뭄을 맛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들은 감사의 춤을 추는 자들이 되어갑니다. 또한 우리들의 감사의 춤을 가지고 주님은 멋지게 이 세상을 꾸려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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