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안내
주보
주보 모음
설교 영상
설교 원고
찬양
실시간 예배
2015년 이전 설교

부흥케 하옵소서

날짜 : 2007.01.1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부흥케 하옵소서
성경본문 : 하박국 3:1-4, 17-19

1886년 겨울, 서울 정동에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에 낯선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황해도 장연군 소래에서 올라온 이들이었습니다. 1882년 만주에서 세례를 받고 들어온 서상륜이 의주-소래-서울을 오가며 복음을 전하여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세례 지원자들이 생겼는데, 이들은 선교사가 자기 마을로 내려와 세례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정부의 눈치를 보며 선뜻 지방 전도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한 그들이 서울로 올라온 것입니다.

“저희에게 세례를 주십시오.”

“당신들이 누구인 줄 알고 세례를 줍니까?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선교사와 소래 교인들 사이에 신앙 문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래 교인들은 이미 3년 넘게 성경을 읽으며 신앙 생활을 해 왔던 터라 선교사의 질문에 막힘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믿기지 않은 듯 언더우드가 의심하는 눈치를 보이자 그들은 두루마기를 벗고 돌아섰습니다. 등에는 하나같이 나무 십자가가 묶여 있었습니다.

“그게 뭐요?”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서울에 선교사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기다리다 못해 올라오기로 했는데, 출발하기 전에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마 16:24, 개역한글)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은 곧 서울이니 우리가 서울에 올라가면서 그냥 갈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각자 십자가를 만들어 지고 온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서울, 예루살렘으로 가기에 각자 십자가를 만들어 지고 온 순진한 초신자들의 모습입니다. 물론 성경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기에 좀 우수꽝스러운 느낌도 듭니다만 오늘 현대인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모습이라고 봅니다. 아울러, 그들의 모습 그대로가 오늘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기념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귀한 도전이 된다고 봅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전에 평양에서는 대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설명해 드리는 것보다는 이만열 교수님의 자료를 직접 읽어 드리는 것이 여러분이 이해하기에 쉬울 줄로 생각됩니다. 1월 14일부터 계속 진행이 되었는데 1월 14일에 일어난 일만 소개해 드립니다.

*14일(월): 정오에 선교사들 기도. 저녁 7시에 모여 짧은 설교와 간증 후 집에 가도록 함. 500-600명 정도 남음. 통성기도, 울부짖으며 죄고백, 건장한 남자들이 가슴치며 통곡, Lee의 요리사 회개, 한 사람이 김 장로에 대한 증오를 고백. 새벽 2시까지 집회 계속. 한 사람씩 일어나 죄 고백: 믿기 전에 동료를 죽였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다. 교회직분자였으나 도둑질함. 어느 장로는 선교사에 대한 증오를 회개. 어느 집사는 믿기 전에 딸을 독살함. 통성기도-‘바다의 파도’같은 열정과 강도, 회중의 1/2내지 2/3가 귀가한 후 합심기도 시작. 간증하려고 1시간씩 기다림. 무서운 죄의 고백들이 끊이지 않음. 죄 고백후 고통의 울부짖음. 바닥에 쓰러져 바닥을 침. 저녁: 짧은 설교 후 Lee 목사 집회 주관. 통성 기도-하나님의 보좌를 두드리는 기도의 바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음. 오순절 때와 같음. 그날 밤-성령이 울음소리와 함께 오심. 몇 사람의 울음이 있은 잠시 후 모든 회중이 통곡.

이와 같은 사건은 일시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평양을 비롯한 한국 많은 도시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에 마가렛 베스트 선교사는 변화하는 평양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평양은 변하고 있고 점점 더 거의 그리스도교적 도시로 되어가고 있다. 이제 도시를 다닐 때에 무당의 북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고, 내가 선교사 주택지역 근처 바깥 마을들 중 하나에서 소리를 들은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한국의 새해 이른 아침에 나는 내 옆방에서 잠을 잤던 나의 성경 부인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녀가 창가에 들어 올린 말은 ‘새 세상이다’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를 불러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물었다. 그녀는 말했다. ‘연기가 이웃의 모든 집들의 굴뚝에서 올라오고 있다.’ 몇 년 전에 사람들은 조상 제사를 하느라 밤을 지새고 제사 때 드린 음식을 가지고 늦게까지 잔치를 하곤 했다. 그렇게 잔치를 한 후에 깊은 잠에 빠져서 이른 아침 식사를 위해 불을 피우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른 아침 식사도 없었다. 새해 첫날 새벽에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는 전에는 이교도였던 집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이 여인에게 웅변적으로 말해주었고 흥미롭게도 ‘새 세상이요’라는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이러한 평양대부흥의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오늘 한국의 모든 교회는 또다시 대부흥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삼천리 금수강산 곳곳에서 “새 세상이요” 노래가 다시금 퍼지길 기도하며 오늘 모든 한국교회가 100년전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새 세상이요.” 바로 이 노래가 부흥운동의 노래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새 세상이요” 하는 노래소리가 퍼질까?

엊그제 산책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저를 보더니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New England Patriots, 47hours” 평소에도 미국 사람들 말을 못 알아 들을 때 먼저 웃고 넘깁니다만 이 때도 먼저 웃고 넘겼습니다. 그 때 제가 New England football팀인 Patriots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바로 그 때부터 47시간후에 San Diego Chargers팀과 경기를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열열한 팬이었던가 봅니다. Patriots 모자를 보자 저를 보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Patriots 47 hours.”

오늘 오후에 San Diego에서 경기가 벌어집니다. Boston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오늘 하루 종일 San Diego에 가 있을줄 압니다. football뿐인가요? Boston 사람들을 더욱 열광적으로 만드는 것은 야구입니다. 봄철에서 가을까지 보스톤 주변은 늘 야구경기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저는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스톤Fenway구장에 봄에서 가을까지 예배하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는 날이 온다면 바로 그 날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요? “새 세상이요.” 이 것은 헛된 망상일까요?

저는 오늘 설교 준비를 하면서 먼저 평양대부흥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사실 저는 신학교를 미국에서 다닌지라 한국교회사에 대해 class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제가 몰랐던 많은 것을 느끼는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편 한국에서는 평양대부흥이 유명한 사건이지만 미국에서는 대부흥이 세번 일어났습니다. 이번 기회에 저는 미국 부흥 역사와 한국 부흥 역사를 대조하면서 설교 준비를 하였습니다. 특히 부흥 역사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무엇이 대부흥을 가져왔는가에 대해 면밀히 질문해 보았습니다. 1차 2차 대부흥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New England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로서 느낀 것은 부흥의 현상은 비슷했습니다. 모두 깊은 회개가 있었고 또 합심기도회가 있었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 같았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부흥의 현상이었습니다. 곧이어 무엇이 대부흥을 일으켰는가 질문이 생겼습니다. 곧 이런 부흥을 가져오는 촉매제가 무엇인가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촉매제가 무엇인지 알면 우리는 또 다른 부흥을 시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부흥의 현상에 대해서는 잘 밝혀져 있지만 이 부흥을 일으킨 촉매제에 대해서는 별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공통적인 이 촉매제가 분명히 있을텐데 숨겨 있는듯 했습니다. 결국 저는 이 숨겨져 있는 촉매제는 성경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저나름대로 대부흥의 촉매제를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대부흥을 일으키는 촉매제가 무엇인지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촉매제가 보이지 않습니까?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이 말씀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오래 전 어느 한국 교회에 가보았더니 앞에 banner에 이 귀절이 쓰여 있었습니다.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그 교회에서 예배드리면서 ‘교회 부흥을 꾀나 사모하는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그 교회가 부흥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문제는 여기에서의 ‘부흥’은 우리가 생각하는 숫자적 ‘부흥’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박국서에서 나오는 부흥은 어떤 부흥일까요? 단어 공부를 먼저하면, ‘부흥’의 원어의 뜻은 ‘새롭게 하소서’ 입니다. 곧 ‘주의 일을 새롭게 하소서’ 입니다. 하박국은 지금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주의 일을 새롭게 하소서.” 하박국은 숫자적인 부흥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배가 운동을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박국 선지자가 말하는 ‘주의 일’은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겠죠.

하박국이 말하는 ‘주의 일’은 1, 2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1, 2장에 기록된 말씀을 살피면 주의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1, 2장의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남왕국인 유다왕국을 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배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남왕국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기도가 이상하게 응답됩니다. 자기는 이스라엘의 죄를 처리해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해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뿐이 아닙니다. 남왕국을 벌준 바벨론도 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을 벌하시겠다는 말씀은 곧 온 천지의 죄를 처분하시고야 말겠다는 뜻일줄 압니다.

사실 하박국이 처음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을 들었을 때는 놀라서 반항하였습니다. 무서운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박국은 죄책감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하박국의 기도를 하나님은 너무 엄청나게 응답하십니다. 곧 자기의 기도 때문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박국은 반항하였지만 하나님도 굽히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벌한 바벨론까지 멸하시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십니다. 드디어 하박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을 맛보고 온 남왕국이 또한 온 세상이 회개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3장에 와서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그러니 이 기도는 참 위험한 기도였습니다. 진노를 초청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잘 되는 것과 하나님 보시기에 잘 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잘 되는 것은 먼저 죄가 사함 받는 것입니다. 죄가 사함 받기전에는 아무런 것도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엉뚱하게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에는 이처럼 위험한 요소가 다 있지만 하박국의 이 기도는 정말 진노를 초청하는 기도입니다. 하박국도 이 기도가 진노를 초청하는 기도인지 이제는 너무나 잘 았았습니다. 그래서 2절 마지막 절에 하박국은 귀여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이 기도에는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은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잘 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을 맛보아야 합니다. 이에 하박국은 기도합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그런데 이것은 자신의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모든 회개의 기도에는 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이에 어떻게 하시나요? 하나님은 금방 하박국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아니 놀랍게 응답하십니다. 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하박국은 긍휼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오는 것을 봅니다. 사실 하박국은 지금 바벨론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 올 것을 상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벨론의 무서운 군대가 동쪽에서부터 몰려들 것을 생각하며 공포 가운데 있는데 웬걸 남쪽 지역인 데만과 바란산에서 누군가가 오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코뿔소처럼 달려오고 있습니다. 놀라운 힘을 안고 달려오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빛을 동시에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동시에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흥이 있었던 곳마다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이 얽혀져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노와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그동안 대부흥 역사에서 체험했던 일들입니다. 대부흥 운동의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처음에 평양대부흥 당시 회개하는 모습들을 소개해 드렸는데 모두들 하나님의 진노를 체험하며 회개운동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 안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미국의 제 1차 대부흥을 이끌었던 요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의 가장 유명한 설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 손 안에 붙잡힌 죄인들’ 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교합니다.

“악한 인간이 지옥 밖에서 잠시라도 있을 수 있는 다른 길은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오 죄인들이여! 당신들이 무서운 위험 가운데 처해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곳은 거대한 진노의 용광로이고, 광활한 무저갱입니다. 진노의 불이 가득 찬 그 곳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손안에 붙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옥에 떨어진 많은 이들에게 진노하시는 것만큼 당신에게도 진노를 품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이 당신을 매단 가느다란 실을 비추고 매순간 그것을 그을리고 있으며,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은 회개기도로 나타났습니다. 평양대부흥이나 미국의 대부흥 모두 곳곳에서 회개기도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회개 기도가 있는 곳에는 진노가 사랑에 삼킨바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신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회개하는 자들은 자기에게 임할 진노가 예수님에게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잘 되는 삶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역사가 남왕국에서 일어나길 원하셨습니다. 바벨론에서 일어나길 원하셨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미국에서 한국에서 전세계에서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런 놀라운 회개운동이 또다시 펼쳐질까요? 물론 개인적으로는 먼저 회개하여야 할줄 압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삶을 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이 피로물든 미국 땅에, 한국 땅에 전 세계에 회개의 물결이 또 다시 번질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곧 우리는 대부흥을 일으킨 촉매제를 찾아야 합니다.

17, 18절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십자가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아니 십자가를 질 때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사람을 통해서 참 부흥은 임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진정한 부흥의 촉매제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동안 있었던 대부흥운동의 주역들을 이 관점에서 다시 살펴 보았습니다.

사실 1907년 평양대부흥이 일어나기전 4년전에 원산에서 먼저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이 불길이 평양으로 번진 것입니다. 그 부흥의 불길의 주역이 하디라는 선교사인데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어 첫 번째로 명하신 것은 내가 선교사 생활의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였던 이곳 사람들 앞에서 내가 실패하였다는 것과 그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괴롭고 창피한 일이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오늘날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하여 내시려고 이 일을 선하게 여기시어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십자가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미국의 요나단 에드워즈, 죠지 윗트휠드, 드와이트 예일대 총장 모두 자신의 십자가를 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자들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런 자들을 통해서 부흥 역사는 일어났으며, 지금도 부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더 이상 하나님께서 지치셔서 새로운 부흥을 일으키시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달려 오실 만반의 준비를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며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기도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들의 기도소리를 들으실 때 그는 달려 오십니다. 코뿔소처럼 달려 오십니다.

이들은 자신의 나무십자가를 맨 자들입니다. 나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던 예수님은 지금도 나무 십자가를 매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들에게 달려 가십니다.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회개 운동을 시작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은 하나님은 누구를 찾고 계실까요?

처음 나무십자가를 매고 선교사님을 찾아온 초신자들을 소개해 드렸는데, 사실 평양대부흥도 이런 순진한 그리고 말씀대로 십자가를 매는 분들로 인해서 일어났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순진한 자신의 나무십자가를 매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지난 안식년 기간에 보스톤에 머무를 때는 주일에는 저희 보스톤노회 소속 교회들을 방문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 아침에는 늘 새벽같이 교회에 나오곤 했었는데 이 때는 10시쯤 집을 떠나 교회로 행하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길거리가 한산한 것이 참 이상스러웠습니다. “왜 이렇게 한산할까?” 혼자 생각을 했는데 잠시 후 “사람들이 주일에도 교회에 안 가기에 이처럼 한산하구나”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주일날 평소보다 더 거리가 붐비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싻터 올랐습니다. 교회로 가는 인파로 인해서 경찰이 비상근무를 해야되는 날이 온다면 그 때 우리는 “새 세상이로다”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이런 날은 불가능할까요? 우리가 만일 우리의 십자가를 진다면 이런 일들은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달려 오실테니 말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이번 설교 준비를 위해서 읽었던 [부흥의 계절]이란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부흥역사를 다룬 책입니다. 제일 마지막 결론에 가서 아니 결론에서도 제일 마지막 부분에 가서 저자는 유대인 선교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 북미에는 가장 많은 6백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유럽에는 4백만여명이 살고 있으며, 이스라엘에도 약 4백만명이 있다. 대략 2백만명이 거주하는 뉴욕은 유대인이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도시이다. 이들 유대인 공동체가 메시아이신 예수께로 돌이키는 길을 안내하는 인도자가 누가 될 것인가? 그 일이 곧 일어날 것인가? 성령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성취시키실까?”

저자는 마지막 부흥은 유대인들 안에서 일어날 것을 아니 일어나야 할 것을 강조하는듯 합니다.

토요일 아침 드라이브를 하다 보면 제일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걸어서 회당에 가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들도 우리와 함께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들도 우리와 함께 주일날 인산인해를 이루는 대열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불가능할까요?

교우 여러분, 누차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위치한 Brookline의 40%가 유대인입니다. 그들의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지 않을까요? 우리의 십자가를 지십시다. 유대인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우리도 부흥의 주역이 되십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달려 오실 것입니다. 코뿔소처럼 달려 오실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기도입니다. 하박국의 기도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This entry was posted in 2015년 이전 설교.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291 아이의 손에 이끌리어 admin 2015.05.03
290 안식의 기쁨 admin 2015.04.26
289 나를 만져보라 admin 2015.04.12
288 갈릴리로 가라 admin 2015.04.05
287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admin 2015.03.29
286 그를 기억하리라 admin 2015.03.15
285 나는 내 양을 알고 admin 2015.03.08
284 나의 친구라 admin 2015.03.01
283 은혜를 입은 자 admin 2015.02.08
282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가노라 admin 2015.02.01
< Prev 1 2 3 4 5 6 7 8 9 10 30 ... Next > 


The Korean Church of Boston (PCUSA) 32 Harvard St. Brookline, MA 02445
교회 : (617) 739 - 2663, (617) 277 - 8097 / Fax : (617) 739 - 1366 / 담임 목사 : 이영길 목사 (781) 467 - 0002
  Powered by The Korean Church of Bo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