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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 입은 자들” 요한계시록 3: 1-6 (07/03/2022)

마틴 슈레스키라고 바이올린을 만들고 수리하는 분이 계신데 영성가로서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17세기에 제작된 멋진 아마티 바이올린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주 매력적이고 가치있는 악기로서 곧 그 바이올린에 매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써 내려 갑니다.

“하지만 완벽과는 거리가 먼 바이올린이었습니다. 형태가 대칭을 이루지 않았고, 바이올린의 덮개에는 어두운 마디가 뻗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 바이올린의 개성을 이루었고, 그 자체로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그 바이올린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흠이 없지는 않군. 하지만 뭔가가 있어.””

 

요즘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매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섯번째 교회인 사데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을 나눕니다. 아직 일곱 교회를 다 나누진 않았지만 저는 요즘 한 질문을 마음에 안고 한주 한주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제 마음 속에 있는 질문은,

‘왜 성령께서는 역사의 거대한 마지막을 보여주는 요한계시록의 시작을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시작하셨을까?’

한편 저는 스스로 이렇게 이유를 생각하며 매주 말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는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교회를 대표한다.’

곧 일곱 교회 안에 오고가는 모든 교회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일곱 교회에 말씀하심을 통해서 모든 교회에게 역사의 위대한 마지막을 보여주시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역사에 동참토록 하시기 위하여…. 여러분이 그동안 다니셨던 모든 교회는 물론 보스톤 한인 교회도 이 일곱 교회 안에 담겨져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면 이 일곱 교회 안에 담겨진 세상 모든 교회를 향해 주님은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실까요? 아마 이런 마음이 아닐까요?

“흠이 없지는 않군, 하지만 뭔가가 있어.”

 

오늘 다섯번째 교회인 사데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나누는데 주님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시고 사데 교회를 대하시고 계신지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단 일곱 교회를 살펴 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수 있다고 봅니다. 한 부류는 책망을 받은 교회 또 한 부류는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 그러면 지난 네 교회는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지 결론만 말씀드립니다. 네교회 모두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 중 세 교회는 책망도 함께 받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지난번에 나눈 두아디라 교회에 하신 말씀만 소개해 드리면, 2: 19, 20,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이처럼 칭찬과 책망을 함께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함께 나눌 다섯번째 교회 사데 교회는 어떨까요? 3:1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 교인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깜짝 놀라도 보통 깜짝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그동안 네 교회는 모두 주님께서 칭찬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니 사데 교회 교인들도 당연히 칭찬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어떤 칭찬의 말씀을 하실까 이 상상 저 상상을 하면서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웬걸,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교회는 고유명사를 따서 생긴 이름이죠. 저희 교회처럼 ‘보스톤 한인 교회’…. 그런데 보스톤은 잘 아시겠지만 영국의 어느 마을 곧 ‘보스톤’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따서 편하게 지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데’는 뜻이 있는데 ‘living’, ‘살아있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곧 ‘살았다’라는 고유명사를 가진 도시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를 주님께서 책망하시기를 “너는 ‘살아 있다’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 ‘살아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실상 ‘너는 죽었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석가들에 의하면 사데 교회는 사실 그 이름 처럼 교회도 여러모로 부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일곱 교회 중에 제일 잘 나가는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칭찬 거리가 무척 많은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 교회 차례가 왔을 때 여러 가지 자기들이 받을 칭찬을 상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씀하셨다고요? 잔뜩 칭찬을 기다리는 사데 교회 교인들에게…?

“네 행위를 아노니 네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얼굴이 새파래졌을 것입니다. 그동안 자기들은 믿음 소망 사랑이 모두 뜨겁게 살아 움직이는 교회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의 많은 교회의 부러움을 한 몸에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신이 없는 그들에게 주님은 쐐기를 박습니다. 2절,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주님은 word play 곧 단어 게임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데 교인들은 말씀드린대로 자기들의 믿음 소망 사랑은 살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믿음 소망 사랑’이 거의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거의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데 교회가 되려면 이 죽어 가는 것들을 다시 살리라는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브에노스아히레스에서 목회를 잘 하시고 계셨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이 계신데, ‘제자입니까’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그 책을 쓰시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200명 가까운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는데 2년만에 600명이 되었습니다. 3배가 되었습니다. 예배는 물론이거니와 행정에 이르기까지 손색 없이 발전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산 교회 곧 사데 교회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 부터인가 조금만 신경줄을 놓으면 금방 무너져 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모든 것을 놓고 2주 정도 기도처를 찾아 갔습니다. 성령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너는 자라나고 있질 않다. 네 생각에, 네가 교인 수를 2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고 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이 쪄가는 것이다.”

 

아마 오르티즈 목사님은 사데 교회가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인줄 알았는데 죽어가는 교회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데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 드린 것 같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는 다음과 같이 회개합니다.

“여러해 동안 우리 오순절 교회가 갈라디아서 5:22절을 강조하지 않고 사도행전 2:4만을 강조한 것에 대해 회개합니다.”

사도행전 2:4절 말씀은,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갈라디아서 5: 22, 23절 말씀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두 말씀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책을 쓰신 것입니다. 사데 교회 목회자로서….

 

결국 사데 교회 목회자인 오르티즈 목사님은 후에 이런 훌륭한 책을 쓰기까지 죽은 교회가 아니라 정말로 산 교회의 목회자로서 목회를 훌륭히 감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르티즈 목사님 교회가 오르티즈 목사님의 회개로만 다시 새로와 졌을까요? 4절 말씀,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들이 흰 옷을 입고 주님께// 함께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으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니엘의 친구 세 명이 느브갓네살 왕의 명령을 어기고 우상에 절을 하지 않아서 풀무불 속에 던져집니다. 그들은 옷을 더럽혀지지 않은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후 풀무불을 보면서 왕은 고백합니다. 다니엘 3: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세 친구들과 주님께서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대로 요한 계시록은 구약 전체를 잘 이해해야 풀이가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곧 다니엘의 친구들의 이야기는 이미 사데 교회 안에도 펼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가 죽어가는 교회라고 책망하시지만 그래도 그 안에 우상을 섬기지 않는 몇 명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다니엘 시대나 초대교회 시대나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우상을 섬기지 않는 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미 나눈 3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우상을 섬기지 않는 자들의 특징은 회개하는 자들입니다. 회개한 자가 아니라 회개하는 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서 회개한 자와 회개하는 자들을 구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회개해서 주님을 영접했어도 늘 회개하는 사람은 의로운 길을 갑니다. 회개하길 멈춘 사람들은 불의한 길을 갑니다. 그리고 주님은 회개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십니다. 풀무불 속에 있는 다니엘의 친구들과 함께 다니셨듯이….

 

주님은 다니엘의 친구들의 모습과 회개하는 자들을 비교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회개하는 자들은 풀무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곧 회개하는 자들은 승리자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3:5절 말씀,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들 곧 회개하는 자들이 이기는 자들임을 밝히시고 계십니다. 이들이 누릴 축복을 선포하십니다.

 

사실 오늘까지도 주님의 역사는 늘 회개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회개한 사람이 아니라…. 이들이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는 사도바울을 빼 놓을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디모데전서 1: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도바울은 모든 죄인 중에 자기가 제일 악한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사도바울의 뒤를 이어서 사랑의 원자탄의 저자 손양원 목사님, 그리고 성 프란시스, 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 등 스스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통해서 주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끄셨습니다. 이들로 인해 주님은 세상에 희망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말씀하시곤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뭔가가 있어….”

 

///이처럼 사데 교회 안에도 주님은 스스로 죄인의 괴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그래도 뭔가가 있어….”

 

주님은 스스로 죄인의 괴수라고 생각하는 소수의 무리를 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 소수의 무리가 주님께는 희망의 싸인인 것입니다. 이들과 함께 주님은 새 시대를 열어 갑니다. 위대한 역사의 마지막을 향하여 돌진하십니다.

 

보스톤 지역에 대형 교회가 몇 교회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Park St교회 또 그레이스 채플 등…. 한번은 Park St교회 사역자를 만나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지역 대형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 중에 꽤 많은 숫자가 늘 대형 교회를 옮겨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바로 21세기의 사데 교회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늘 해오고 있었습니다.

 

한편 지난주에 중앙 아시아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후에 대화 중에 또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로 Park St교회에서 중앙 아시아에서 온 난민들을 제일 많이 돕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님 내외가 그 지역 언어를 잘 알아서 요즘 그 난민들을 돕기에 무척 바쁘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쁘게 된 이유는 바로 Park St교회가 그들을 초청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이지만 그 안에 늘 회개하는 교인들이 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죄인의 괴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기에 그런 훌륭한 사역을 사데 교회로서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교회를 보시면서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흠이 없지는 않군, 그래도 뭔가가 있어….”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속한 공동체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의 잘못을 헤아리기 전에 먼저 회개하는 자가 되십시다. 스스로 제일 악한 죄인의 괴수임을 고백하십시다. 그 때 승리자가 됩니다. 주님께서 흰 옷을 입혀 주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주님은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아울러 우리들의 이름은 결코 생명책에서 지우지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사랑의 원자탄의 저자 손양원 목사님의 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오늘 새벽 기도 때에 여전히 은혜가 많았다. 낮에 정 선생의 간증에 나는 큰 죄인임을 깨닫고 나는 두렵게 떨고 울었다. 나에게는 큰 이적 두 가지가 있다.

  1. 나 같은 죄인에게 호의 호식케 하신 것. 내 죄 소행 보면 벗기고 굶겨도 오히려 죄는 남는 나 같은 것에게
  2. 또한 나 같은 죄인을 택하여 성신의 역사가 있게 하시고 한국의 부흥사로 역사케 하시는 것은 내 참 알 수 없다.”

 

손 목사님을 보시면서 한국을 향해 주님은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뭔가가 있어….”

 

이제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보시면서 말씀하시지 않으실까요? 우리가 스스로 손양원 목사님처럼 죄인의 괴수임을 고백한다면 말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최악의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불러서 흰 옷을 입히시고 그들의 손을 잡고 인류 역사를 위대하게 만드시고 계십니다. 이들이 승리자입니다.

 

승리자가 되십시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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