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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에 입맞추라.” 시편 2: 1-12 (08/07/2022)

오래전 영국의 BBC방송국이 지난 1000년 동안 세계 제일의 탐험가가 누구인가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습니다. 1위는 단연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가 차지했습니다.

콜롬버스는 수년간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들을 설득한 끝에 스페인 왕의 허락을 받고 신대륙을 향한 모험적 항해를 떠납니다. 이 날이 1492년 8월 3일 그리고 두달이 지난 10월 12일 현재 카리비안에 있는 섬에 도착합니다. 물론 콜롬버스는 끝까지 인도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지나고 보면 두달이 짧은 것 같지만 그 당시 선원들에게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는 길고도 긴 여행이었습니다. 콜롬버스는 다음과 같이 항해 일지에 써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예정보다 항해가 길어지고, 육지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선원들은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선상 반란의 움직임마저 보일 정도였다. 사실 날씨와 환경, 음식물 어느 것 하나 불평의 대상이 아닌 게 없었다.”

선원들은 두려움과 분노에 몸을 떨며 콜럼버스를 노려보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스페인으로 귀항하자는 암묵의 협박이었습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태연하게 책을 읽으며 절망하는 선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흘만 더 나아가면 육지가 보일 것이다.”

그런데 극적으로 사흘째 되는 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사실 콜롬버스는 지친 선원들과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항상 다음과 같은 말로 항해일지를 끝맺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서쪽으로 전진하고 있다.”

 

교우 여러분,

교우님들은 오늘도 아니 요즘 어느 쪽으로 전진하시고 계십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쪽으로 전진하길 원하시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주 말씀드린대로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씨리즈를 마치고 지난주부터 시편 씨리즈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1편의 말씀을 나눴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1편의 주제는 ‘복 있는 자’입니다. 1절의 시작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고 이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번성하고 형통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지난주부터 시작된 시편 씨리즈를 통해서 ‘복’을 향하여 전진하는 여행을 시작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줄 압니다. 왜냐하면 1편부터 ‘복’을 주제로 펼쳐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도 2편을 통해서 ‘복’을 향한 여정을 계속해 볼까요? 1절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리는가?”

그런데 시작부터 반전이 있습니다. 갑자기 180도 달라지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연일까요? 아니면 시편 편집자의 의도가 있을까요?

 

사실 신학자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적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편집 과정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시편 1, 2편이 시편의 introduction이라고…. 얼마전 BNI에서 김성진 교수님도 시편에 대해서 강의하셨는데 김 교수님은 시편 1, 2편을 시편의 도입부라고 설명하십니다.

한편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머지 148편은 시편 1, 2편의 사이에 위치한다’. 어떤 시는 1편에 더 가깝고 어떤 시는 2편에 더 가까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곧 1, 2편이 시편의 도입부임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구상해 보았습니다. 시편이라는 놀라운 축복의 궁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궁전에 들어가려면 먼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문은 두 개의 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1편과 2편. 이 두 문을 동시에 열고 들어가지 않으면 한쪽 눈은 감고 축복의 궁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쪽만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칫 넘어지기도 하지 않을까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유진 피터슨은 현대 기독교인들이 자주 넘어지는 것을 보았는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현대 사회에는 둘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시편 1편은 좋아하지만, 2편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현대인들이 2편은 무시하게 되었고 어떻게 다시 회복할수 있는지를 염두에 두고 2편 말씀을 계속 살펴 보고자 합니다. 2, 3절,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나 주위 강대국들 사이에서 늘 치여 지내던 민족 내지 나라였습니다. 저희 한국이 늘 이웃 나라 사이에서 힘들게 줄다리기하며 살아 왔듯이….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 시를 읽었을줄 압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바라 보게 됩니다.

사실 이들에게는 다윗 왕조가 있었습니다. 자기들을 괴롭히는 자들은 실은 다윗 왕조를 세우신 분을 대적하는 것임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하나가 될 것을 다짐하고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4절 말씀이 더 힘을 실어 주었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이들은 상상합니다. 다윗 왕조를 모함하고 해치려는 자들의 모든 계략을 보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웃으시고 계시다고…. 그래서 그런지 유대인들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유머를 잃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면 않을수록 하나님의 모습이 더욱 가까이 와 닿습니다. 5, 6절,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비웃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진노하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진노하시면서 온 세상에 선포하십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게 시온산에 거하는 다윗 왕조는 당신이 세운 왕조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왕조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이고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실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기까지 보면 정말로 시편 1편과는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결코 다른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시편을 해석할 때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편 1편의 이미지는 홀로 시냇가에 서 있는 나무입니다. 반면 시편 2편은 숲입니다. 나무들이 모여 있는 숲. 이 숲을 때로는 민족으로 때로는 나라로…, 아니 제일 좋은 표현은 공동체가 될줄 압니다. 민족 공동체 더 나아가서는 인류 공동체….

 

시인은 하나님께서 민족 공동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계신지를 깨닫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공동체를 지키고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왕을 시온산에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산에 세운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내지 국가를 축복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시편2편의 멧세지를 잘 이해하고 민족 공동체 내지 인류 공동체를 통한 축복의 궁전을 드나드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 얼마전 은퇴하신 독일의 총리 메르켈의 부모님이 계십니다.

아버님 카스너는 루터교 목사님이신데 서쪽에서 신학을 마친 후 고향에 가서 목회하길 원하셨습니다. 고향은 동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2차대전이 끝나면서 동서독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270만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합니다. 이 때 동독에 있던 많은 목회자들도 탈출하였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수가 무척 부족했습니다.

카스너 목사님은 도리어 이 때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하신 것입니다. 민족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주하셨을까요? 이때 메르켈은 태어난지 6주가 되었었습니다.

 

갖 태어난 메르켈은 후에 독일의 총리가 됩니다. 메르켈에 대해서 더 길게 말씀드릴수는 없습니다. 다행히 동독은 신앙의 자유가 얼마큼은 보장되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이끄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자랍니다.

그러나 동독은 동독입니다. 결국 아버지가 동독으로 이주해 온 귀한 뜻을 한참 성장한 후에야 알게 됩니다. 어느 기자는 메르켈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합니다.

“메르켈 총리는 언제나 자신이 국가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자신을 믿고 독일의 미래를 개척하자고 권합니다.”

이는 메르켈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국가관이 얼마나 그의 삶속에 스며들어 있는지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물론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말한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을 연상시키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이 말은 그의 정적들이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 아버님의 민족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메르켈은 어느덧 민족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가는 자질이 생겼던 것입니다. 메르켈은 어릴 때부터 모든 독일 국민들은 스스로 국가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어릴 때부터 국가를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국가라는 표현을 했을줄 압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2편의 말씀을 통해서는 공동체의 축복을 깨닫고 민족 공동체를 위한 삶을 살 때 어느덧 주위에는 민족을 이끌 지도자가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를 중심으로 진실로 멋진 민족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조금더 나아가서 인류 공동체를 위하는 사람들 주변에는 인류 공동체를 이끌 지도자가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이런 복된 삶을 살게 될까요? 이런 환경이 주어지지 않으면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할까요? 7절,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우리 안에 오신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어떤 모습일까요? 9절,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철장과 질그릇’, 최근 많이 들은 것 같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중 두아디라 교회에 하신 말씀에서 인용이 되었습니다. 계시록 2: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시편 2편을 통해서 메시야가 이런 철장을 받게 될 것이 예언되었는데, 이에 주님은 이 철장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것을 두아디라 교인들에게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철장은 모든 일곱 교회 교인들 그리고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 손에 철장이 과연 주어져 있나요? 이 철장은 무엇일까요?

 

어느 신학자는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철장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에서 찾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 3:2)

이는 천국이 이미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영어로는 ‘Kingdom of Heaven.’ ‘천국’은 공동체적 개념입니다. 아니 천국과 공동체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피로 사신 공동체에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나라로 온 세상 나라를 무찌르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선한 공동체가 악한 공동체를 무찌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가 철장입니다.

 

그동안은 시편1편을 통해서 비춰진 주님의 모습만을 뵈었는데 이제 2편을 통해 보여지는 주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 곧 공동체의 주인으로 오시는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모습을 뵈올 때 주위에 메르켈의 부모님과 같은 분이 없을지라도 저절로 공동체적 신앙인이 되어 갑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철장 곧 공동체 안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십자가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축복은 정말로 누구에게도 열려져 있을까요? 10절,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사실 이미 2절에서 군왕들은 분파를 나누고 세상을 파괴하고 있는 사람들로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초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아마 군왕들은 너무 뜻밖이라 멈칫 멈칫 하고 있는듯 합니다. 하나님은 왔다리 갔다리 하십니다. 책망하실 때는 언제고 이제는 가장 최고의 축복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망설이고 있는 군왕들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12절,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군왕들을 초대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묻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에게만 입을 맞추면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입을 안 맞추면 하나님의 넘치는 진노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키쓰냐 진노냐…!

 

그런데 마지막 절 마지막 말씀이 눈에 띄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공동체의 복으로 2편을 마칩니다.

 

1편은 ‘복있는 자는’으로 시작됩니다. 2편은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로 마칩니다. 1편은 개인의 복, 2편은 공동체의 복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의 도입부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개인의 복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을 보면서 그는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 1편은 좋아하지만, 2편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콜롬버스는 서쪽을 향하여 전진했습니다. 시편 편집자는 시편 1, 2편을 도입부에 넣음으로 시인들이 어디로 향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개인으로 향했고 아울러 위대한 공동체로 향했습니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이 둘이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함께 전진하십시다. 그의 아들에 입맞추십시다. 십자가의 주님 앞에 무릅을 꿇으십시다.

 

토마스 멀톤이라는 잘 알려진 영성가가 있습니다. 그는 혼자서 수도를 많이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영성에 관한 책을 많이 쓰신 분입니다. 당연히 기도를 많이 하신 분입니다. 그는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마지막은 아우슈비치에서 끝나야 한다.”

그의 기도는 개인을 넘어 교회를 넘어 민족과 국가를 넘어 온 인류 공동체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는 항상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었던 것입니다.

 

21세기의 아우슈비치는 어디일까요?

 

교우 여러분,

함께 시편 1, 2편의 문을 들어가십시다. 시편이라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궁전을 탐험하십시다. 아우슈비치에서 주님을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2년반 전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매주 수요일 ‘르호봇 이야기’ 씨리즈 동영상을 보내드렸습니다. 그후에 오신 분들은 잘 모르실텐데 궁금하시면 웹싸이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자주 반복해 드렸던 표현이 있습니다.

“잘 되고 있습니다.”

“잘 될 것입니다.”

특히 이민자는 순례자인데 걸으실 때마다 “잘 되고 있습니다”, “잘 될 것입니다.” 외치실 것을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시편의 주제는 ‘복’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곧 시인들 마음에는 늘 이 노래가 있다고 봅니다.

 

처음 소개해드린 콜롬버스가 끝까지 항해를 성공할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어두움 가운데서도 이 노래를 불렀기 때문일줄 압니다. 매일 항해 일지에 “우리는 오늘도 서쪽으로 전진하고 있다” 적으면서 그의 가슴에는 이 노래들이 있었을줄 압니다. 아울러 앞으로 계속 살펴 볼 시편의 저자들의 마음 속 깊이 이 노래가 흐르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개인의 삶을 생각하면서,

“잘 되고 있습니다. 잘 될 것입니다.”

때로는 공동체의 삶을 생각하면서….

 

함께 시편 1, 2편의 문을 들어가십시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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