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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마가복음 12:1-12 (04/02/2023)

 

랍비 요하난이 여러 도시를 순례하였습니다. 한 도시에 도착하자 그 도시 권력자가 거만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우리 도시는 지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만드는 곳입니다.”

랍비는 찬 음성으로 말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저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겠군요. 저는 지금 ‘사람’을 가장 잘 만드는 도시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랍비는 사람을 가장 잘 만드는 도시를 찾아 나섰습니다. 반면 한 유명한 도시의 지도자는 빵을 잘 만든다고 자랑합니다. 오늘 많은 도시의 지도자들의 모습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만일 랍비 요하난이 보스톤에 와서 여러분을 만나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여기는 사람을 가장 잘 만드는 도시이니 안내해 드리겠다고 말씀하실수 있을까요? 아니면….

 

오늘 종려 고난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것을 기념하며 드리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종려나무를 들고 환영하고 어떤 이들은 겉옷을 벗어 땅에 펴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성대한 환영식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환영가를 부릅니다.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11:10) 그런데 이들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가득찼을까요? 이 도시는 사람을 가장 잘 만드는 도시라고 생각하면서 나귀 타시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맞이했을까요?

주님은 이들의 마음을 잘 아셨겠죠. 그리고는 그 다음날 곧 월요일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는 성전을 깨끗케 하십니다.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으십니다. 아마도 주님은 이들 안에 있는 종교적 교만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으십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분노를 삽니다.

 

그 다음날 곧 화요일에 또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번에는 기다렸다는듯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와서 먼저 시비를 겁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11:28)

이에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11:30)고 되물으시면서 KO펀치를 날리신 후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이 시작됩니다. 1절,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주님께서는 자주 하시던대로 당신에게 도전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주인은 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였습니다. 그냥 땅을 빌려 준 것이 아니라 친히 포도원을 만들고는 산울타리를 두릅니다. 그리고는 즙짜는 틀도 만들어 놓습니다. 망대를 지어 줍니다. 완벽한 포도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번거러운 일들은 다 끝낸 것입니다. 남은 것은 포도를 가꾸고 포도를 따서 포도즙을 만드는 즐거운 일만 하면 됩니다.

 

저희 집 뒷마당에 나팔꽃을 심었고 매년 나팔꽃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고 몇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화원을 가꾸자니 생각만해도 머리가 아픕니다. 대신 나팔꽃씨를 주어다가 담장에 뿌리기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매해 즐깁니다.

 

사실 주인은 이 궂은 일은 다 알아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즐겁게 농사 짓게 하고는 후에 렌트비만 받겠다고 하면서 타국으로 떠난 것입니다. 어느 주석가는 원래 타국이 고향인 사람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청중은 생각합니다. “정말로 땡잡았네 농부들은…. 가장 어려운 일은 다 주인이 해 놓으시고 쉬운 일만 남았으니….” 그뿐 아닙니다. 이들은 렌트비를 내고도 많은 수익을 얻었을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서 주인은 한 종을 보냅니다. 렌트비를 받으려고…. 3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청중은 깜짝 놀랍니다.

“어찌 이럴수가…. 주인은 포도원을 손수 잘 가꾸어 놓으셨고 이제 수확한 후 팔면 되는데…. 거저 먹는 장사인데….”

농부들을 향해 분노의 생각을 품습니다. 4절 상반절,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청중은 기대합니다. “이번에는 잘 하겠지, 그동안 반성했겠지….” 4절 후반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이제는 머리에 상처까지 내고 능욕까지 합니다. 아니 포도원에 어떤 하자가 있거나 하면 몰라도…. 두번째 종의 잘 못은 전혀 찾을수 없습니다. 있다면 주인의 말씀에 순종해서 첫번째 종이 핍박을 받은 사실을 알고도 찾아 온 것뿐입니다. 청중은 또 다시 주먹을 불끈 쥡니다.

“어찌 이럴수가…!”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이런 친구들은 혼을 내 줘야지…. 나 같으면 큰 군대를 동원해서 이들을 모두 잡아 혼내 줄거야….” 그런데 5절,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이제는 청중도 돌변합니다. 더 이상 농부를 향해서 주먹을 불끈 쥐지 않습니다. 주인을 향해서 불끈 쥡니다.

“군대를 보내서 농부들을 잡아야지, 애꿎은 종들을 또 보내다니…. 분명히 종들을 사랑하지 않는 주인이네…. 종의 목숨을 파리 목숨 보다 못하게 생각하네…. 돈 몇 푼이 아까워서 종들의 목숨과 바꾸다니….”

 

한편 어떤 청중은 이런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니체가 한 말입니다.

“괴물과 싸우다, 당신도 괴물이 되지 않게 하라.”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아예 이들은 상대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원래 고향인 타국에서 잘 사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청중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인은 돈을 좋아하던가 아니면 종들을 사랑하지 않는 바로 주인도 괴물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을 것입니다.

농부도 주인도 못 마땅하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귀를 기울입니다. 6절,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청중들은 소름이 끼치는 느낌을 받습니다. “어떻게 군대를 보내야지,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 이 주인은 아들의 소중함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네! 렌트비에 환장을 한 사람인가 보네.”

이 당시에는 많은 분들이 자녀를 잃는 경험을 당연히 했습니다. 청중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녀가 아무리 많아도 한 자녀를 잃는 아픔은 숫자로 비교할수 없음을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박완서 작가가 아들을 잃고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기차가 달리고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유치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는 참아줬지만 88올림픽이 여전히 열리리라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식이 죽었는데도 고을마다 성화가 도착했다고 잔치를 벌이고 춤들을 추는 걸 어찌 견디랴. 아아, 만일 내가 독재자라면 88년 내내 아무도 웃지도 못하게 하련만,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해본다.”

 

많은 청중들이 이 당시 박완서 작가와 같은 경험을 하였다면 이들은 주님의 이 비유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이 주인은 아들을 잃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군…. 아들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야…. 아들마저 잃으면 어쩔려고 그러면 포도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어질텐데….”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갖고 듣습니다. 아들의 말을 듣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7, 8절,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농부들은 아들을 죽입니다. 이유는 아들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하여 아들의 유산은 바로 포도원이었습니다. 아들을 죽인 후 포도원 밖에 내던집니다. 아들은 더 이상 포도원과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은 자기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포도원에서 나는 최고의 포도상품은 자기들 것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렌트비를 낼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자기들 세상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시기 약 400년전 세 사람은 소크라테스를 고발하여 아테네 법정에 세웁니다. 그들의 이름은 뤼콘, 아뉘토스, 멜레토스. 결국 배심원 500여명을 위증으로 현혹하여 70세의 소크라테스에게 30표차로 사형이라는 유죄 선고를 내리게 한 후. 독배를 마시게 하여 소크라테스를 처형시킵니다. 법정에서는 그리스 청년을 무신론자로 만드는 악덕을 고발하기 위한 것으로 진술했지만 사실은 현자 소크라테스에 대한 질시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전형적인 농부들입니다.

 

이 비유를 누가 듣고 있다고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듣고 있습니다. 이들이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않았을까요? 모두 지식인들이었는데…. 이 비유를 들으면서 분명 소크라테스를 죽인 세 사람이 떠 올랐을 것입니다.

 

이를 들으면서 분명 이 청년이 자기들을 향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구나 느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바로 소크라테스를 죽인 세 사람과 같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느낀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청년은 계속 말합니다. 9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속이 부글부글 타오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옳다는 것을 애써 증명하려고 합니다. 스스로 증명할수 있는 좋은 무기가 있습니다. 말씀입니다. 머리를 굴려서 깊숙히 숨겨져 있는 말씀을 끄집어 내려고 하는데…. 10, 11절,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말씀으로 자기 방어를 하려는데 벌써 예수라는 청년이 말씀으로 자기들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상이 버린 쏘크라테스가 세상의 성인이 되어 갔음을 연상시키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들이 버릴 사람이 세상의 구세주가 될 것을 연상시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에 어떻게 반응하죠? 12절,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 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늘 말씀드렸지만 비유를 들을 때 청중은 둘로 나뉘어집니다. 당연히 이 비유를 들으면서 두 그룹이 생깁니다. 한 그룹은 분노합니다. 자기들이 바로 쏘크라테스를 죽인 악한 세 사람과 비유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이 청년을 죽이고자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힘을 선택합니다. 힘으로 청년을 죽이고자 합니다. 그런데 당장은 못합니다. 무리의 힘을 느낍니다. 무리들의 힘을 자기들의 힘으로 사용할 때까지 기다릴수 밖에….

 

한편 다른 한 그룹은 마음에 찔림이 옵니다. 마음 속 깊이 바로 농부가 자기들 안에 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깨달음은 놀랍게 발전합니다. 한편으로는 힘 없이 포도원 밖으로 내던짐을 당한 아들의 모습이 강하게 남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아들이 포도원에 내던져지는 것을 전혀 막지 못한채 안타까워하는 주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 주인의 안타까운 모습이 떠오르면서 놀라운 깨달음이 찾아 옵니다. 주인이 아들을 그 위험한 중에도 보낼수 밖에 없음은 바로 주인의 농부들을 향한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랑이 아들을 아무 방어도 없이 보낸 것입니다. 농부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농부들을 사랑해서 한번도 기회를 주는 길은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힘을 포기 하여야 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힘을 내려 놓는 것임을 이들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곧 이들의 눈 앞에는 한참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하고 포도원 밖으로 내던짐을 당하는 아들의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쏘크라테스는 그래도 70세에 포도원 밖으로 내던짐을 당했지만 자기들은 훨씬 젊은 아들을 내동댕이 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유는 주인이 힘을 포기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두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빵을 잘 만들어 내는 도시 그리고 사람을 잘 만드는 도시…. 빵을 잘 만드는 도시는 바로 힘을 자랑하는 도시입니다. 반면 사람을 잘 만드는 도시는 힘을 포기하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길까요? 다시 10, 11절,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힘빠진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이 비유의 매력은 여기 있습니다. 오늘의 비유가 주는 멧세지는 주님은 빵을 잘 만드는 도시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 도시를 사람도 잘 만드는 도시로 바꾸시길 원하십니다. 버려진 돌을 가지고…. 이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아무 군대로 보내지 않고 모든 힘을 뺀채 보내신 것입니다. 끝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모습을 보고 삶의 힘을 빼신 대표적인 분이 주기철 목사님이라고 생각됩니다.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십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른 것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이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받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이까?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리이까?”

 

그리고 이 세상이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최고의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곳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전혀 피가 섞여 있지 않은 요한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십니다. 남남이 함께 형제 자매 부모가 되는 최고의 아름다운 도시를 가꾸는 것이 당신의 꿈이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참 사람이 만들어지는 도시 말입니다.

 

사실 주님은 예루살렘성이 참 사람이 만들어지는 도시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시며 고백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 41, 42,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말씀을 거둡니다.

서예의 대가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명필이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손과 어깨에 힘 빼는 데만 40년 걸렸습니다. 서예는 힘 빼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저도 골프를 조금 배우다 그쳤지만, 늘 자주 듣던 말이 힘을 빼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이 세상을 참 사람이 사는 최고의 세상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힘을 빼셨습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당신의 군대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은 사람의 손에 잡히셨습니다.

 

금주 당신의 모든 힘을 빼심으로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십시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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