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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새롭게 하자

날짜 : 2007.12.30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과거를 새롭게 하자
성경본문 : 예레미야 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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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John)이라는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는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존이 세살이 되었을 때입니다. 여느 때처럼 기계를 만지고 있었습니다. 비디오 기계를 만지고 있었는데 녹화를 하고 또 보곤 하였습니다. 한 시간쯤 만지더니 엄마를 쳐다보며 말합니다.

“엄마,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세요?”

기계를 만지던 아이가 다짜고짜로 인생의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기계를 다시 쳐다보더니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는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합니다.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리와인드 버튼(rewind button)이 없는거예요.”

2007년도를 열심히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 지우고 싶은 시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지울수 없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가슴속 깊이 한 가지 아픔으로 새겨지는 것 같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지우고 싶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시간을 새로이 살고 싶은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 그러한 마음을 포기합니다. 그것은 이루워질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과거는 어찌할수 없는 것이라는 절망감을 안고 살고 있는듯 합니다.

이러한 절망감을 갖고 살았던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입니다. 카라일은 자기의 비서인 제인 웰쉬(Jane Welsh)와 결혼을 합니다. 결혼 후에도 제인은 계속 비서일을 봅니다. 그런데 결혼 후 제인이 병이 들었습니다. 칼라일은 돈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신 자신의 일에는 혼신을 다해서 헌신한 사람입니다. 부인의 병환에는 그리 큰 정성을 쏟지 않습니다. 계속 자신의 일에 몰두합니다. 부인에게는 계속 일을 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암에 걸린 부인은 결국 침대에 눕게 됩니다. 카알라일은 부인을 진실로 사랑했지만 일에 매여서 부인을 잘 돌보지 못합니다.

수년 후 부인은 세상을 떠납니다. 장례식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 옵니다. 처음으로 허전한 집을 느낍니다. 제인의 방에 들어가 제인 침대 옆 의자에 앉았습니다. 부인의 일기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첫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어제는 그가 나와 한 시간을 같이 앉아 있었다. 천국과 같았다. 나는 그를 참으로 사랑한다.” 다음 페이지로 넘겼습니다. “나는 하루종일 그의 문소리를 기다렸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오늘도 집에 안 오나 보다.” 몇가지 일기를 더 읽더니 집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제인의 무덤으로 갔던 것입니다. 무덤 앞에서 진흙을 뒤집어 쓰고 소리지릅니다.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미리 알았더라면…”

제인이 세상을 떠난 후 칼라일은 거의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 후 15년을 더 살지만 그의 마지막 15년은 홀로 아무러 의욕이 없는 지루한 허송 세월을 보냅니다. 그의 절망은 한마디로 리와인드(rewind)할 수 없는 인생에 대한 절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송년예배로 드립니다. 어쩌면 리와인드를 할수만 있으면…’ 하는 생각으로 이 예배를 드리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리와인드를 할 수 없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러한 생각조차 들지 않습니다. 단순히 지난일은 어쩔수 없으니 새해나 잘해 보아야지 라는 생각을 안고 예배를 드리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칼라일처럼 너무 큰 절망적인 일을 당하신 분들은 내년에 대한 희망도 잃은채 무덤덤하게 예배를 드리실지 모르겠습니다. 2007년이 일생 일대에 가장 돌이킬수 없는 한해라는 절망을 안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새해에 대한 희망도 없습니다.

반면 제일 좋은 케이스는 올해 궂은 일을 당하지 않아서 내년도도 올 해처럼 좋은 일들이 가득 넘치기를 바라며 예배를 드리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도 rewind를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 삶을 살아 보고 싶으니까…. 그러나 그런 분의 숫자는 과연 몇명이나 될까요?

죄인들의 특징은 잘 된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 보다는 잘 안된 것으로 인한 상처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자신있게 말씀 드릴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을 리와인드(rewind)할수 있다면 리와인드하고픈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좋았던 일보다 나빴던 일들이 더 가슴 깊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아픈 마음을 안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픈 마음을 안고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말씀으로 위로하실까요?

오늘 송년주일을 맞아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어떻게 보면 송년을 맞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포로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포로들은 매해 송년이 되면 이 말씀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아니 매해 송년이 되면 회당에 모이곤 했을텐데 그 때마다 랍비가 성경을 열어 봉독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송년예배를 드렸는지 그리고 송년예배를 드렸다면 어느 말씀을 봉독하였는지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좀더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송년예배때 사용한 것으로 간주하고 말씀드리려 합니다. 랍비는 송년예배를 맞아 선포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년이 지나면 의례히 랍비의 이 말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얻습니다. “지난 일년도 잘 참았는데 한해도 잘 참자. 올 해 하나님의 약속이 임하는 해가 될지 누가 알아. 올 해는 해방될지 몰라” 생각하면서 송년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해가 거듭할수록 랍비의 말은 변함이 없고 또 변함 없이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워지지 않습니다. 또 다시 송년예배를 맞이 합니다.

그런데 매해 송년예배마다 랍비가 같은 메세지만 전하니 어떤 사람들은 더 이상 별로 기대를 갖질 않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송년예배를 매해 참석하셨을텐데 송년예배라는 말을 들을면 금방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오늘은 대충 이런 설교를 하시겠군!’

지나간 일은 돌이킬수 없습니다. 리와인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맙시다. 새해가 찾아 오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후회하지 않는 한해가 될것입니다.

매해 송년예배마다 같은 메세지를 듣습니다. 그런데 일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니 세월이 지날수록 더 요원해지는 느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송년예배에 식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랍비도 이젠 눈치를 챘습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예레미야의 말씀에 식상이 되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해는 랍비가 다른 성경을 봉독합니다. 랍비는 그 유명한 예레미야 29장10절을 봉독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늘 송년예배만 되면 새 해에는 좋은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들은 알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는 70년 포로생활을 채워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이 노래집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송년예배때 마다 새해를 기다려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70년이 지나야 합니다. 이 후로는 좀 계산적인 사람들은 송년예배 메세지에 전혀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계산적인 사람들은 벌써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직 70년이 지나려면 수십년이 더 지나야 하니, 랍비의 메세지는 전혀 우리와는 해당이 안되.” 그리고는 랍비가 희망의 말씀을 선포해도 이제는 뒤에 앉아서 비웃습니다. “아직도 수십년이 남았는데….” 결국 이들은 원망합니다. 선조들의 죄때문에 자기들이 포로생활을 하니 선조들을 원망합니다. 어느덧 이들에게는 송년예배는 원망의 예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정말 이처럼 미련하실가요? 한편으로는 70년을 기다리라 하시고는 또 한편으로는 곧 해방이 이루워질 것 같이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은 이처럼 앞뒤가 안 맞는 미련한 하나님이실까요?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도리어 선조들만 원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실까요?

그러나 지혜로운 백성들은 곧 하나님을 진실로 만나며 사는 백성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련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뜻을 품고 계심에 틀림없다.” 그리고는 말씀을 깊게 상고해 봅니다. 분명히 29장에는 70년이 차야 해방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을 확인합니다. 30장 말씀을 통해서는 어떤 기간을 말씀하시지 않고 해방을 말씀하십니다.

이 두가지 말씀을 가지고 깊게 묵상합니다. 처음에는 조상들의 죄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조상들의 죄를 사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조상들의 땅으로 돌려 보내실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마음 속에 새로운 희망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쪽으로는 답답한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려고 해도 70년은 너무 깁니다. 아무리 묵상을 해도 더 이상은 큰 기쁨이 오질 않습니다. 조상의 죄가 사해지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 가는 것을 묵상했는데 기쁘긴 기뻐도 그렇게 크게 기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묵상을 하면 할수록 조상의 죄말고 해결해야 될 다른 무엇이 있음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의 죄는 해결하시는데 자기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느낍니다. 아직도 해방의 날은 먼데 그동안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용서의 확신 아니면 자신의 삶에서 생기는 아픔에 대한 해결은 전혀 없음을 느낍니다. 어느덧 조상의 죄는 사그리 잊어 버리고 지난 일년간의 자신의 죄와 상처와 아픔을 생각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리와인드(rewind)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리와인드는 되지 못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일년간의 죄와 실수와 상처를 계속 상상 중에 만나고 있는데, 어느 순간 확신이 생깁니다. 우리조상의 죄를 70년만에 사하시고 다시금 해방시키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 사랑을 생각하니 더욱 자신있게 일년간의 아픔을 찾아갈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깊게 찾아 갑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일년간의 삶을 색칠합니다. 어두웠던 시간을 특히 강조하여 하나님의 색깔로 색칠합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토록 리와인드(rewind)하고 싶었던 사건들도 어느덧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서 자신의 자서전에 기록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리와인드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집니다. 최고의 한 해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포로생활 가운데서도 누구도 체험할수 없는 최고의 한 해였던 것입니다. 아니 더 이상 바벨론 포로가 아니었습니다. 70년이 아니라 80년 90년이 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 그는 해방을 맞이 한 것입니다.

이 지혜자는 깨닫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한편으로는 70년 포로생활을 말씀하시고 또 다른 곳에서는 시간적 제한을 말씀 안하셨는지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과거를 살펴 보는 자들에게는 이미 해방이 온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의 리와인드가 필요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 안에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바로 자기의 과거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색칠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과거를 색칠할 수 없습니다. 그 능력은 자신안에 있는 특권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매해 송년예배만 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마음껏 발휘합니다. 과거의 시간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색칠하는 즐거움의 시간을 갖곤 하는 것입니다.

칼라일이 이러한 지혜를 소유했더라면 그러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요? 그는 현대의 최고의 역사학자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지혜가 없었습니다. 과거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결국 마지막 15년을 아무 일도 못하고 슬픔가운데 살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가 만일 자신의 과거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그 동안 이룩한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업적을 이루어 놓으시지 않았을까요?

그는 역사를 파해치는 예리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과거를 아름답게 색칠하는 예술가는 되지 못했습니다.

칼라일과 정반대의 삶을 사신 분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프레드릭 부흐너(Fredrick Buechner)입니다. 저의 목회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저의 목회방식내지 철학을 저는 ‘이야기 목회’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 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입니다.

제가 13년전에 본교회에 선을 보이기 위하여 왔을 때 한 설교가 있습니다. 제목이 ‘야곱의 춤’입니다. 그 제목부터 시작하여 저의 첫 세번의 설교집으로 야곱씨리즈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춤이라는 설교를 하게 되었던 것은 이분의 책을 읽고 받은 감명으로 인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여러모로 저는 이 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분은 지금 80세가 되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분은 벌써 세권의 자서전을 펴냈습니다. 자서전을 세권 쓰신 사람은 이 분밖에 없을줄 압니다. 물론 렘브란트(Rembrandt)같은 분은 많은 자화상을 그렸습니다만, 자화상과는 다릅니다 자화상은 여러가지로 그릴수가 있겠죠. 사실 세권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두권입니다. 56세때 첫 자서전을 펴냅니다. 이는 주로 어릴 때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듬 해 57세 때 신학교를 다니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제2의 자서전을 펴냅니다. 그러니 이 둘은 하나의 자서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약 십년후 65세때 세번째 자서전을 펴냅니다. 세번째 자서전의 제목이 ‘Telling Secrets’입니다. 자신의 가장 아픈 상처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분에게 가장 아픈 상처가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알콜중독자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부흐너씨가 10살때입니다. 아버지는 차고에 들어가더니 차발동을 킵니다. 그리고는 영영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동차 안에서 자살을 한 것입니다. 아무도 교회를 안다녔기에 장례식도 치루지 않습니다. 화장을 해서 강에 띄운 것이 마지막입니다. 그 후 아무도 아버지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부흐너씨도 아버지의 기억을 지우다시피 합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나서 그는 아버지를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그는 마음껏 아픔의 장소로 돌아 갑니다. 아버지와의 아팠던 경험들을 생각합니다. 아픔의 현장을 방문하면 할수록 새로운 자신이 되어감을 체험합니다. 자신이 변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무한한 하나님께서 주신 가능성을 만납니다. 놀라운 작가가 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억력을 주신 것은 기억하라고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는 마음껏 과거를 방문하고 또 방문합니다. 어느덧 그는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첫 자서전을 아버지에게 바치는 책으로 발간합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리와인드(rewind)하게 만드시진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반면 기억력을 주셨습니다.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기억력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색깔로 과거를 다시 색칠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과거 입니다. 우리의 과거는 지금도 미완성이 작품이 되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타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경험을 통하여 그는 ‘Alphabet of Grace’(은혜의 알파벳)라는 책을 펴냅니다. 곧 모든 인생은 은혜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과거가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갈 뿐더러 어느새 자신은 아름다운 화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멋진 그림들을 그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렘브란트와 같은 화가는 아니지만 새로운 인생의 그림을 그려주는 화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화가가 될 때 우리는 가장 훌륭한 작품을 남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도 그러한 화가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한 화가가 되기 위하여 오늘도 우리는 송년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우리의 과거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찾아 옵니다. 언제나 찾아 올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만이 우리의 과거의 마지막 타치를 할수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타치를 받기 전 과거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은혜의 알파벳으로 우리의 과거를 맞이하십시다. 그 때 우리는 더욱 알찬 새해를 맞이 하게 될것입니다. 2007년도는 곧 지나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지막 타치를 하지 않는다면 결코 지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진다구요?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으셨겠습니까? 과거가 아름답게 색칠되지 않을 때마다 십자가의 주님 앞에 나오십시요. 그 때는 우리의 과거를 만나기 전 주님을 만나야 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가 터지는 고통의 시간을 치루셨습니다. 이 주님을 깊게 만날수록 우리는 더욱 멋진 화가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홍색 피를 흘리신 주님은 우리에게 과거를 미래를 아름답게 색칠할 물감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물감으로 우리들의 아픈 과거를 아름답게 색칠하십시다. 그 때 우리는 더욱 밝은 새해를 맞이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아름답게 색칠한 만큼 우리는 온 세상의 어두운 일도 아름답게 가꿀수 있는자가 되어 갈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아름답게 가꾸지 못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자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자들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교우여러분 2007년도를 최고로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 보십시다. 은혜가 넘치는 축복의 새해를 맞이하십시다.

과거를 아름답게 가꾸는 자들에게 놀라운 새 땅은 예비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류시화 시인이 다음과 같은 글을 소개합니다.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라.

행복과 고통은

다른 세세한 사건들과 섞여들어

정교한 무늬를 이루고

시련도 그 무늬를 더해 주는 색깔이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 무늬의 완성을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아메리칸 퀼트’중에서)

2007년도도 우리들의 삶의 하나의 무늬였을 것입니다. 행복했던 고통스러웠던 원대한 우리들의 삶의 그림에 하나의 무늬였을 것입니다. 은혜로운 알파벳으로 마지막 타치를 하고 보내십시다. 그리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십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 일년 일년을 이처럼 보내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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