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7.09.04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예배하는 나그네(ll)
성경본문 : 창세기 28장 20-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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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일학년 학생이 학습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선생을 죽여 달라고…. 이 소식을 선생님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말합니다.
“너는 선생님을 죽여 달라고 기도할 게 아니라 알파벳을 죽여 달라고 기도해야 한단다. 내가 죽으면 다른 선생님이 나 대신 와서 널 가르칠테니까.”
이 글을 얼마 전에 읽었는데 이 글을 읽은 후 혼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의 학창시절중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 언제인가? 나도 이 아이처럼 선생님이 죽기를 바랐을 때가 있었던가?’
사실 이 아이처럼 이런 기도는 하지 못했어도 선생님이 싫었던 때는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중학교 삼학년 때 담임 선생님 별명이 있었습니다. ‘고물상.’ 그 선생님은 물상을 가르쳤는데 요즘에도 물상과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물리라고 생각하면 될줄압니다. 중학교때는 ‘물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성이 ‘고’씨였습니다. 그래서 ‘고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별명은 별명이고 별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기억이 생생합니다. 3학년이 된 첫 날 친구들과 운동장에 서서 심각하게 걱정을 합니다. ‘이 번 일년 어떻게 보내지.’ 그런데 그런 걱정한지도 벌써 4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철없이 친구들과 함께 걱정하던 모습이 우습기만 합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그 선생님을 죽여 달라고 기도한 기억은 없습니다. 한편 지금 다시 만난다면 그 어느 선생님보다 반갑게 대할 자신이 있습니다.
오늘이 9월 첫째주일입니다. 벌써 시작한 학교도 있고, 아직 시작 안했으면 이 번 주간에는 모두 시작할줄 압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도 ‘예배하는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대로 이 곳에 공부하러 오신 분들은 나그네들이십니다. 나그네로서의 삶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학교공부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꼭 잊지 마셔야 할 것은 예배하는 나그네가 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바로 예배하는 나그네였습니다. 그로 인해 온 가족이 복을 받고 온 이웃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 곳에 사시는 교우분들도 예배하는 나그네의 축복을 받을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한다면, 우리도 어느새 예배하는 나그네가 되어 갑니다. 우리도 같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예배하는 나그네로서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요? 공부하기가 어렵다고 이 어린이와 같은 기도를 해도 되나요? 본문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지난 주 본문 말씀에 이어서 20절에서 22절입니다. 지난주 본문의 줄거리를 말씀드리면 얌체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뺏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마저 형 에서에게서 가로챕니다. 어쩔수 없이 외삼촌이 사는 하란으로 도망을 갑니다. 도망가는 도중 길바닥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야곱을 축복합니다. 네가지 축복을 약속합니다. 땅을 선물로 받습니다. 자손의 축복을 약속받습니다. 이웃을 위한 복의 근원이 됩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노라 약속하십니다.
이에 야곱은 이 곳이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얌체 야곱은 예배하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 이름을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주 본문말씀의 줄거리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집에서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니 서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먼저 야곱은 전제 조건을 세웁니다. 야곱의 기도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이 서원의 전제 조건이고 두번째 부분이 야곱의 결심입니다.
먼저 서원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와 함께 계시사,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야곱은 하나님께 전제 조건을 내세웁니다. 누구를 죽여 달라는 전제 조건은 내 걸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이 전제 조건은 지난 주 말씀중 15절 말씀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재차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뜻 보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어워서 이렇게 서원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나 생각도 듭니다만, 그러나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당연히 있지만 그 때 그 때 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다시금 하나님의 약속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돌아 가고 또 돌아가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보면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야곱의 서원과 15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비교하게 되면 묘한 차이점을 보게 됩니다. 15절과 20절을 비교하게 되면 15절에 없는 말이 20절에 삽입된 것을 볼수 있습니다. 15절과 20절을 봉독해 드립니다.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15절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20절입니다. 정확히는 21절 초반절까지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무엇이 더 붙혀졌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가 덧붙혀졌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실 때 당연히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실 것이니 이 말씀을 안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고백합니다. 아니 전제 조건으로 내겁니다.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이 것을 덧붙혔을까요? 어떻게 보면 인간의 기본권인 ‘의식주’중에 두가지를 요구하는 것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어느 유대교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관찰하였습니다.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훔치기 위해서 아버지 이삭에게 들어 갈 때 어머니가 만든 먹을 것과 어머니가 입힌 가죽털을 입고 이삭에게 들어 갔습니다. 이 신학자가 관찰하기는 이 때 사용된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사용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야곱은 지금 하나님께 전제 조건을 내걸고 있다는 것입니다.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여기서 야곱이 얼마나 얌체인지 치가 떨리는 얌체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기도했겠습니까? “에서의 축복을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빼앗은 욕심 많은 저의 죄를 용서하소서”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두뇌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사.”
야곱의 이 고백은 자기가 에서를 속인 것이 늘 마음속 한 구석에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서원의 전제조건으로 내 건 것입니다. 얌체 야곱은 하나님에게 가려주시는 하나님이 되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자 나의 것을 가려주시는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하여튼 야곱은 이와 같은 조건에 따른 자기의 서원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야곱은 자기의 죄를 ‘이는 이’로 갚지 않으시기만 하면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실 것을 약속합니다. 뭔가 기마이를 쓰는 것 같습니다. 또한 자기가 세운 돌이 하나님의 정이 될 것을 약속합니다. 마지막 약속이 눈에 뜨입니다. 십일조를 약속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야곱은 마지막으로 그래도 괜찮은 고백을 하는 것 같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면 그렇게 괜찮은 고백도 아닙니다. 자기의 허물을 가려주시고 먼 길 오고 가는 것을 보호하시고 많은 재산이 생겨서 돌아오게 된다면…, 생각해 보십시다. 그 중의 십분의 일, 너무 적지 않습니까? 야곱은 끝까지 얌체입니다. 여러분이 야곱의 처지가 되었더라면 십분의 일만 서원하겠습니까?저는 아마 이렇게 고백했을지 모릅니다. “저를 갑부가 되어서 돌아오게 하신다면 반을 드리겠나이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 서원을 어떻게 받아 드리셨을까요? 과거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도 안하고 은근히 둘러서 말하고는 십분의 일만 드리겠다는 야곱입니다. “과연 너는 어쩔수 없는 얌체구나…?”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으셨는지 기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많은 우여곡절 끝에 야곱의 서원이 이루진 것을 보아서 곧 성공하여 돌아 온 것을 보아서 하나님은 야곱의 서원을 기쁘게 받으셨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야곱의 서원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우리들의 기준에는 아직도 얌체의 냄새가 무럭무럭 나지만…. 하나님을 이것까지도 덮어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의 서원을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하나님은 마음이 넓으셔서…?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은 돈을 무척 좋아 하신다고 하십니다. 야곱의 이 서원을 받으신 것을 보면 그 목사님 말씀도 맞는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돈을 얼마나 좋아하시기에 얌체처럼 십분의 일만 바치겠다는 것도 냉큼 받으실까요? 사실 창조의 하나님께서 돈을 좋아하신다면 당연히 그 깊은 이유가 있으시겠죠.
아무리 얌체라도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당신의 계획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하나님은 당신의 본래 계획을 포기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야곱을 향한 계획을 창세기 1장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27, 28절말씀입니다. 이 계획은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이유는 온 천지를 다스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 것이요 동시에 인간들의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이제 부터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찾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모두 얌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창조의 계획은 바뀔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계속해서 창조의 동역자로 삼으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얌체인 인간들을 당신의 동역자로 세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그 많은 인간들 중에 누구를 창조의 동역자로 삼으실까요?
이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세지는 하나님은 야곱과 같은 얌체들을 붙드셔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자로 만드신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들을 다시 당신의 창조의 동역자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무리 얌체라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향한 꿈과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돈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라 야곱을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야곱을 하나님의 창조의 새로운 동역자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을 포기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자기의 동역자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얌체라도 자신의 것을 포기할 때 창조의 동역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창조적 삶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사람들은 자신을 버리는 삶이 창조의 삶에 얼마나 주요한지를 역설하곤 압니다.
Michael Card라는 음악인이 있습니다. 여러 좋은 음악도 작곡을 하였고 연주도 하시는 분입니다. 이 분이 창조성에 대한 책을 펴냈습니다. 부제가 ‘그리스도와 창조성’입니다. 마지막 챕터 제목이 ‘The greatest Expression of Creativity: the Giving of Self’(창조의 최고의 표현은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음악인인 그가 음악연주자체가 최고의 창조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주는 것이 최고의 창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는 참 창조를 할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고백은 우리에게 신선한 도전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얌체 야곱을 축복할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창조는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있는 것을 없앨 때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사실 자기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창조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음을 제 2의 아담인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아담을 통해서 하시려던 것을 실패하신 후 제 2의 아담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제 2의 아담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신 분이십니다. 십분의 일이 아닙니다. 절반이 아닙니다. 전부를 포기하셨습니다. 온 세상에 제 2의 창조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 제 2의 창조를 누구와 동역하실까요? 야곱의 고백의 주인공들입니다. 야곱의 이 고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났을 때 그는 제 2츼 창조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주신 예수님은 십분의 일을 바치겠다는 야곱의 기도를 하는 자들을 기뻐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는 야곱의 모든 허물을 덮어 주셨을 뿐더러 야곱의 기도를 통하여 그를 창조의 역꾼이 되게 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예배하는 나그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주에도 많은 분들이 보스톤을 새로이 찾아 왔습니다. 뜻하신 학업에서 좋은 성과를 얻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줄 압니다. 그런데 학업만을 위하여 기도하시지 마시고 시시 때때로 야곱의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기도는 성부 성자 성령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오늘 대학은 참 창조를 잃은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참 창조를 잃은 대학은 도리어 얌체를 만드는 공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최근에 대학교들이 얼마나 상업화되고 있는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대학교 운동경기입니다. 최초의 대학교 운동 경기가 1852년에 하바드와 예일대학교경기로 열렸다고 합니다. 조정(Crew) 경기였습니다. 뉴 햄프셔(New Hampshire)의 Winnepesaukee호수에서 열렸습니다. 이 호수 주변에서 큰 사업을 하는 부자가 이 곳에서 열리면 모든 비용을 대겠다고 하여서 이 곳에서 열렸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이 부자는 더욱 많은 이익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것은 많은 하바드 예일 선수들중에 가짜 선수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이기기 위해서 가짜선수를 고용한 것입니다. 이것이 대학 운동의 시작인 것입니다. 오늘날 수백만 달라가 왔다 갔다 하는 대학스포츠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대학교의 한 모습입니다. 결국 대학교는 얌체를 더욱 얌체되게 만드는 곳이 아닐까요?
저의 사춘 매부가 계십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습니다만 그 분은 미국에 일찍 유학와서 공부를 마치고 대학교수가 되셨습니다. 2, 3년전에 만났는데 저에게 하는 말씀이, “공부를 하면 사람이 더 이기적이 되나봐. 요즘에는 후회가 많아, 젊었을 때 친구들이 자녀 결혼식에 초대를 하면 비행기 값이 없어서 안가곤 했는데 빚을 내고라도 다닐걸 그랬어. 나만을 생각하면서 살다가 이제 은퇴를 하였군….” 뒤 늦게 은퇴하신 후 인생을 깨달은 셈입니다.
그러나 이제 결론은 쉽게 내릴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예배하는 나그네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고백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공부 열심히 하십시요. 그러나 시시때때로 야곱의 고백을 하십시요. 그 때 우리는 도리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자가 되어집니다. 참 인간의 삶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우리의 본연의 모습을 찾게 됩니다.
교우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우리의 모든 것을 가려주시며 우리를 축복하셨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 또한 앞으로도 많은 축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창조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을 포기할 때 우리는 얌체를 넘어서 창조의 동역자가 됩니다.
교우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을 공부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참 창조의 동역자가 되려면 야곱의 고백을 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것을 포기살 줄 아는 자가 참 창조의 동역자가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작은 희생을 서원하는 것 뿐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어떤 남자가 나무 한 그루를 베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수도승이 그 모습을 보고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여기 이 푸른 가지를 보시오. 둥치가 베어진 사실을 모르기에 여전히 싱싱하고 행복해 합니다. 지금 막 자신에게 가해지 불행을 모르고 있지만 그것을 곧 알게 될 날이 오겠지요. 그리고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가지와 그 사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재 베어진 나무의 무지한 생태, 이것이 곧 인간이 처한 상태입니다.”
교우 여러분, 제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자신을 포기할줄 모른 다면 둥치가 베인채 푸르른 나무와 같지 않을까요? 야곱은 자신의 고백으로 인해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야곱의 고백에 동참하십시다. 자신의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포기하는 삶을 사십시다. 그것이 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참 창조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포기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예배하는 나그네인 야곱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