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7.08.2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예배하는 나그네(ㅣ)
성경본문 : 창세기 28장 10-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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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문학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랍비가 자기의 사위를 멀리 유대교학교에 유학을 보내었습니다. 사위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 사위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배웠나?”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배웠습니다.” 랍비는 화가 났습니다.
“내 딸이 자네가 없는 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는데 자네가 배운 것은 고작 그거야? 누구나 하나님이 존재함을 다 알고 있어 우리집에서 일하는 하녀까지도.” 랍비는 하녀를 향하여 말합니다.
“나에게 말해 봐. 너는 하나님이 존재함을 알고 있지?”
“네, 저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어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롤하이져(Rolheiser)라는 신학자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야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관념을 통해서 설명되어지거나 이해되어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상상 안에서 확인될수 없습니다. 느낌을 통해서도 더욱 불가능합니다. 반면 하나님은 경험되어질수 있습니다. 만져질 수 있습니다.”
이 신학자에 의하면 하녀가 참 하나님을 만난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존재를 진실로 이해하고 있는 경험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하녀의 고백이 참 신앙의 시작임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어요.”
그러면 이 하녀는 어떻게 이런 고백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아니 여러분은 지난 주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고백의 주인공이 될수 있을지 본문말씀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하나님을 만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잘 알고 계시는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야곱의 고향은 브엘세바입니다. 이삭이 온 가족을 이끌고 브엘세바에 정착하였었습니다. 그래서 브엘세바가 야곱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아시는 분은 좀 의아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아브라함 곧 자기의 할아버지의 여정을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땅에서 살았습니다. 곧 하란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곧 자기의 고향을 떠나서 잠시 살던 곳입니다. 반면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에서 도리어 하란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방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이 내용을 잘 아시는 분들은 금방 그 이유를 머리에 생각하면서 별거 아닌데 뭐 이처럼 드라마틱하게 이 장면을 설명하려 하시나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번 수양회 강사님도 비슷한 언급을 하셨습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탄의 책략입니다. 무엇을 안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안에 있는 새로운 축복을 종종 빼앗깁니다. 이것이 사탄의 책략입니다.
설교학적으로 말씀드리면 설교에 가장 은혜를 적게 받는 그룹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일까요? 목사님들입니다. 목사님들이 가장 은혜를 적게 받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교회를 오래 다녔다는 사람들 아니면 성경을 많이 안다는 사람들 순서입니다. 왜냐하면 무슨 이야기가 나올 때 “아 이것은 내가 아는 것” 하면서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니, 혼자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 결과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사탄이 좋아 하죠.
이 번 수양회에서 강사님이 은혜로운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은혜를 적게 받은 사람이 누군지 저는 압니다. 한편 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내가 이만큼 은혜를 받았는데 우리 교우님들은 어떨까? 당연히 저보다 많이 받았을테니깐…. 그러므로 성경은 늘 처음 읽는 마음으로 읽을 때 최고의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본문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보겠습니다. 본문에는 그냥 야곱이라고 기록되었지만 그 앞에다가 ‘어린’을 붙이면 훨씬 이해가 쉽게 됩니다. 어린 야곱이 홀로 고향인 브엘세바를 떠나 이방땅인 하란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금방 질문이 생깁니다. ‘왜 어린 야곱이 홀로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향하고 있는가?’ 궁금해집니다. 한편 가여운 야곱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비쳐 옵니다. 자녀들을 대학 기숙사에 내려다 놓고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린다는데 야곱은 그 것보다 더 처량합니다. 홀로 하란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어쩔수 없이 그 전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그전 이야기는 25장 28에서 34절과 27장에서부터 본문 바로 전까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왜 야곱이 하란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이류를 알 수 있습니다.
두가지 장면이 나옵니다. 간략하게만 말씀드리면, 먼저 야곱은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오는 지친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삽니다. 수고하고 돌아온 형에게 팥죽 한 그릇 그냥 주어야 하질 않습니까? 여러분의 막내아들이 그랬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혼내주시겠죠. 더 큰 일은 그 다음 장면에서 나옵니다.
아버지 이삭이 맏아들 에서를 불러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죽기 전에 맏아들을 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에미 리브가가 듣습니다. 리브가는 막내 야곱을 편애하였던 것 같습니다. 리브가가 야곱을 불러 에서로 변장시키고 에서가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어 오기 전 먼저 이삭에게 들어가서 형에게 주려고 했던 복을 다 받게 합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하면 야곱도 야곱이지만 리브가에 대한 의혹이 생깁니다. ‘어떻게 에미라는 사람이 저럴 수가 있는가? 에서는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가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은 그 에미에 그 아들, 에미가 그런다고 야곱은 좋다하고 에서의 복을 가로챕니다.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던 야곱에게는 이것은 굴러들어 온 호박이었기 때문입니다. 멈칫 멈칫할 야곱이 아닙니다.
자 처음에 어린 야곱이 홀로 이방땅 하란으로 가는 장면을 생각했을 때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좀 고소한 생각마저 들지 않습니까? 특히 가족들에게 상처를 받으신 분들은 더 하실줄 압니다. 부모님의 편애로 인해서 당하신 분들이나 형제 자매들의 여러 시기 질투로 인해서 상처를 받으신 분들은 야곱의 이 모습을 보면서 아무 아무개도 이런 꼴이 되어야 하는데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통함을 안고 계속 본문을 읽어 내려 가십시다.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더욱 고소한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길바닥에서 잠을 잡니다. 급히 도망 나왔으니 베개도 갖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잡니다. 돌베개 베고 잠을 잤다, 아주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한번 해보십시요, 낭만적이겠습니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공포조차 느낄 새도 없이 돌이 마치 베개인냥 잠이 든 것입니다. 얌체 야곱은 자신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톡톡히 받고 있습니다. 이제 곰 한마리만 나오면 인과응보의 놀라운 역사가 이루워 질 것 같습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곰의 발자국 소리도 듣질 못할 것이니 말입니다. 숨을 죽이고 그 다음 장면을 읽어 내려갑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곰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을 중상모략한 대가로 여러분의 가족이 멀리 도망을 가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이 것 말이 됩니까? 성경을 탁 덮고 싶으실 것입니다.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셨으니 혼을 내주시지 않으실까? 당연히 공의의 하나님이시면 혼을 내 주시겠죠. 그러면 새로운 기대를 하며 계속 읽어 내려가 볼까요?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속이 뒤틀립니다. 일견해서 읽어도 속이 뒤틀리는데 자세히 읽으면 기절할 것 같습니다. 첫번째 축복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돌베개 베고 자는 땅이 바로 야곱의 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돌베개 베고만 자면 우리 땅이 된다면 어디에서는 못 자겠습니까? 두번째 축복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죽어 마땅한 야곱이 도리어 큰 자손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축복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온 세상 사람들의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생각하기 싫습니다. 어떻게 천하의 얌체가 온 세상의 복의 근원이 됩니까? 그래도 한가지 기대가 남아 있습니다. 제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도 무엇합니까? 하나님을 모르면 끝장이지…, 마지막 기대를 걸어 봅니다. “네가 이처럼 얌체인고로 세상적은 축복은 내려 주겠지만 너는 너를 떠나리라” 말씀하시니 않으실까? 기대해 봅니다. 그런데 네번째 축복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마지막 기대마저 저버립니다. 얌체 야곱은 복 위에 복 위에 복 위에 복을 약속받고 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우리의 기대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은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야말로 막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기대하기는 틀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에게서 야곱으로 우리의 생각의 관심을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이처럼 막 나가시는 축복의 하나님에게 어떻게 반응하였을까요? 어떻게 막나가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자신의 복으로 차지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만이 왜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처럼 축복하시는 지의 마지막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신 이유는 바로 이 고백에 있는 것같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아주 간단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 안에 야곱은 복 위에 복 위에 복 위에 복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입니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나그네가 있는 곳’일줄 압니다. 야곱은 자기는 홀로 나그네가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그네가 되어서 잠을 잔 그 곳에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그네 된 자기를 통해서 놀라운 복을 자손에게 이웃에게 내려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수많은 나그네들이 있는데 그 나그네들을 통해 온 인류는 복을 받아왔다는 말씀이십니까?’ 질문하실 줄 압니다. 이에 대해 그다음 구절이 한가지 실마리를 줍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
야곱의 모습은 한마디로 예배하는 나그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누가 더 얌체고 누가 덜 얌체인 것을 계산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얌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다. 우리들 기준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기준에 더 얌체고 덜 얌체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기준을 떠나 계십니다. 우리가 이 야곱 이야기로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예배하는 나그네를 찾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으시면 야곱에게 이렇게 큰 축복을 내리실리가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통해서 세계를 이끌어 가십니다.
야곱은 돌베개를 가져다 놓고 제단을 쌓습니다. 기름을 부읍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그 곳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있는 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하며 제단을 쌓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아는 예배하는 나그네들입니다.
얼마전 어느 교우님으로부터 은혜로운 간증을 들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그 교우님의 아버님은 바로 예배하는 나그네이셨습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아버님이 혼자 예배를 드리셨다고 합니다. 혼자 노인 아파트에서 사시고 계신데 늘 야곱처럼 혼자지만 제단을 쌓곤 하시는 아버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날 예배를 드리시는데 갑자기 아드님의 모습이 쑥 스치고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 환상을 본 셈입니다. 아버님은 심상치 않은 느낌이라서 아드님께 연락하게 되었고 아버님께서 연락하셨기 때문에 이 교우님은 큰 위기를 모면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교우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버님이 저를 살리셨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시는 것을 들으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예배를 드리지 않으셨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배하는 나그네의 삶을 사시는 아버님 때문에 아드님에게 놀라운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온 가족은 다시 한번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야곱, 물론 얌체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배하는 나그네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온 자손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8월 마지막주일이 되었습니다. 8월말이 되면 보스톤 주변은 새로 오신 분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대개가 유학을 오신분 아니면 연수 오신 분들이십니다.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찾아오십니다. 어떻게 보면 공부하는 나그네가 되어서 이 곳을 찾아오십니다. 일년이던 오년이던 그 이상이던 나그네의 삶을 사시며 공부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실 줄 압니다. 이 기간 목적한 것을 잘 이루시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서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공헌을 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의하면 이 나그네 기간 여러분에게는 또 다른 축복의 삶이 예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손을 위한 아니 온 인류를 위한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예배하는 나그네’가 되신다면….
나그네로서의 삶, 얼마나 처량할 때가 많이 있습니까? 집안에 가구도 제대로 있지 않고, 부엌살림도 그렇고, 한국 생활과 비교하면 한참 뒤지지 않습니까? 기숙사 생활은 더 말할 나위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야곱은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여러분이 나그네의 고통을 안고 살고 있는 곳,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의 고통이 엄습할 때 바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시게 됩니다. 어느덧 여러분은 복의 근원이 되어집니다. 여러분의 자녀와 부모가 여러분으로 인해 복을 받습니다. 온 이웃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하실 점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예배하는 나그네가 되셨어도 나그네는 나그네입니다. 다음 글을 읽으면 정착민들의 눈에 비치는 나그네의 모습을 알게 됩니다.
“나그네는 다르다. 나그네는 다른 문화,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왜냐하면 글들은 우리들의 방법과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을 환영한다는 것은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안에 공간을 허락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들이 주는 불편까지 받아 드릴 때 우리는 진실로 그들을 우리 안에 맞아 드리는 것이 된다. 그 때 우리는 친구됨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새로운 평화를 느낀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나그네는 예언자적인 역할을 한다. 그들은 우리들이 세운 벽을 부순다. 우리를 매어 놓았던 공포에서 해방시킨다. 그들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어떻게 보면 이 글은 사실 나그네들을 위한 글이 아닙니다. 정착민들을 위한 글입니다. 정착민들에게 나그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우치는 글입니다. 정착민들을 위해서 예배하는 나그네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주는 글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나그네로 찾아오신 교우분들이 참으로 예배하는 나그네가 되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문화가 다르고 사고가 다를지라도 예배하는 나그네들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이십니다. 우리가 이들을 이처럼 겸손히 맞이할 때 우리도 계속해서 예배하는 나그네의 삶을 살게 될줄 압니다. 우리도 우리 자손들과 이웃을 위한 복의 근원된 삶을 살게 될줄 압니다. 우리가 정착하여 사는 곳에서도 우리는 야곱의 고백을 할수 있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말씀을 거둡니다.
정호승 시인이 어느 길을 가는데 소나기가 쏟아져 어느 건물의 처마 밑에 서 있었습니다. 잠시 후 어느 할머니가 비를 잔뜩 맞은 채 처마에 들어 왔습니다. 할머니는 딸네 집에 갔다가 비를 맞게 되었습니다. 열무김치를 넣은 보따리를 들고 있었습니다. 빗줄기는 가늘어지고 할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할머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가세요.”시인은 ‘이 할머니를 이제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 것입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물끄러미 소나기 그친 길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는 할머니와의 그 짧은 만남과 이별이 참으로 소중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시인의 마음으로 나그네를 맞이하십시다. 그들은 예배하는 나그네가 될 것입니다. 한편 우리들도 예배하는 나그네가 되어 갈 것입니다. 야곱의 고백에 동참하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로 가는 나그네가 되어 야곱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그네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우리가 있는 처소에서 모두 한 노래를 부르십시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