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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어머니

날짜 : 2007.05.13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모세의 어머니
성경본문 : 출애굽기 2:1-10

http://kcbostonmedia.cponsolny.com/Sermon_video_master/5-13-2007.wmv

어느 미국인 가정의 어머니의 글입니다.

“우리가족은 모두 피클을 좋아합니다. 어떤 종류의 피클도 좋아합니다. 만일 피클이 하나만 남으면 나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줍니다. 아이들은 사이 좋게 나누어 먹습니다. 나는 언제나 양보합니다. 언제나 이래 왔고 또 언제나 나는 양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남편은 다릅니다. 남편은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안해.’ 남편은 절대로 양보 안합니다. 마지막 피클을 보면 남편은 자기가 먹습니다. 그리고 병은 리사이클합니다. 아이들에게 피클을 양보하는 것은 그의 사전에는 없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피클을 양보하는 것에 대해서 남편은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 그것은 엄마들이나 하는 것이지.’”

여러분은 이 가정의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머니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많은 어머님들이 이 분의 남편의 말에 대해서 언짢은 느낌들을 갖게 되셨을줄 압니다. 어쩌면 분을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분을 가라 앉히시고 다음 이야기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1990년도 초에 텍사스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딸이 고등학교 응원단장 팀멤버이었는데 자기 딸이 주장이 되게 하기위하여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주장의 엄마를 죽이는 계획을 세웁니다. 왜 주장의 엄마를 죽이느냐구요? 엄마가 죽게 되면 딸이 cheerleader를 그만 두게 될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당신의 딸이 주장이 될테니까….

사실 이 엄마는 자기 딸을 위해 상상을 초월한 희생을 치룬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바른 희생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더 소개해 드립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산불이 났습니다. 그것도 다섯 군데에서 산불이 났습니다. 그런데 자녀를 둔 어머니가 범인임이 밝혀졌습니다. 드디어 경찰에 잡혔습니다. 왜 어머니가 산불을 나게 했을까요? 아들의 소원이 산불을 끄는 소방소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불끄는 연습을 시키게 하려고 산불을 놓았던 것입니다.

이 세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모성애는 무엇인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결국 한 질문을 품게 됩니다. 참된 모성애는 무엇인가? 어머니 주일을 맞이하여 모세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의 질문을 풀어 가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모세가 출생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출생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이 당시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당시 상황은 본문 말씀 바로 전 문단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1장 22절 말씀을 읽으면 대충 상황을 짐작하실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애굽왕 바로가 모든 태어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 아들들은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이 때 모세가 태어납니다. 모세의 부모는 레위지파였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레위 족속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아마도 출애굽기 기자는 모세가 레위지파에 속한 자임을 알리기 위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한 후 자녀를 낳았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문법적으로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띄입니다. 1절은 주어가 아버지입니다. 한 레위사람이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2절의 주어는 어머니입니다.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아들을 낳는 것까지는 주어가 마땅히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데 그 다음 말씀은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이 아들을 숨긴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는 사실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더 쉽게 알수 있습니다. ‘she’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모세를 숨긴 사람은 어머니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엇을 했는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내가 숨기겠다고 하니 협조한 정도인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가 숨기자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석달 동안 무사히 지냈습니다. 아마도 남편이 늘 불안해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석달을 숨겼는데 더 이상 숨길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큰 결단을 내립니다. 3절 말씀입니다.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졌을 것입니다. 한편 모세의 누이를 보내어서 누구가 모세를 건지나 살펴보게 합니다. 다행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왔다가 모세를 보았습니다. 금방 히브리 아이인줄 알았습니다. 여자는 여자인지라 모세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모세의 누이가 공주에게 가서 히브리인의 유모를 구해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어머니를 모셔 옵니다. 9절 말씀입니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키우기 시작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는 공주가 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건저냄,’ 곧, 모세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공주가 지어주었지만 후에 모세는 모세가 됩니다. 모세는 공주에게 견져냄을 받았지만 후에 이스라엘을 건지는 사람이 됩니다. 곧 모세가 모세가 되게 하는데는 두 분의 여인의 손길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모세를 물에서 건진 공주의 손길입니다.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모세되게 교육시킨 분은 모세의 어머니였습니다. 공주가 모세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건지는 자가 되게 하는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처음 소개드렸던 그 남편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만하다고 봅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 그것은 엄마들이나 하는 것이지.” 자녀들에게 피클을 양보하는 것은 엄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피클을 양보하는 것이 어머니들이 하는 것의 전부일까요? 출애굽기기자는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기자가 생각하는 엄마들이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민족을 구하는 자를 기르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아버지가 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순전히 어머니가 하셨습니다. 물론 모세를 숨기겠다는 아내의 뜻에 반기를 안든 것은 그래도 대단한 일 같습니다만, 아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아들을 그냥 악어 밥이 되도록 강가에 버렸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뜻에 의해서 모세는 살게 되었고 끝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를 구원자로 만들었는데 처음 소개한 두 어머니는 왜 그런 행동을 하였을까?’ 사실 어떻게 보면 두 여인 모두 자녀들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들입니다. 한 어머니는 자신이 살인자가 되기까지 희생했습니다. 한 여인은 방화범이 되기까지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자녀들을 사랑합니까? 얼마나 멋있습니까? 어떤 방법론적이 차이일뿐이지 모세의 어머니나 이 두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한 것은 공통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 나머지 세 분 모두 자녀를 위해 희생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구원자가 되었고 아니 모세의 어머니는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었고 두 분은 자녀도 망치고 자신도 망쳤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어머니와 이 두 분의 어머니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차이점을 생각하기 전 먼저 공통점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세 분 모두 희생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의학적으로 보면 여성분들은 희생하도록 태어났다고 합니다. 어머니들이 자녀를 출산할 때 필요한 홀몬으로 oxytocin이라는 홀몬이 있습니다. 이 홀몬이 나와야지만 labor가 시작됩니다. 유도분만할 때 주는 약이 바로 이 oxytocin아닙니까? 곧 아이를 날 때는 이 홀몬이 많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홀몬은 어머니를 희생적인 삶을 살게 하는것 같습니다. 이 oxytocin홀몬을 가지고 쥐에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이 홀몬을 아직 새끼를 낳아 보지 않은 암컷쥐에다 투여를 하니 갑자기 이 쥐가 자기가 낳지도 않은 다른 새끼 쥐들을 돌보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로서 과학자들이 추측하는 것은 이와 같은 여러 현상으로 인해서 어머니들은 희생적을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까요? 바다에서 사는 문어는 최고로 희생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문어에게는 optic gland가 있는데 문어가 알을 낳게 되면 곧 바로 이 gland에서 홀몬이 나옵니다. 식욕을 없애는 홀몬입니다. 식욕이 없어졌으니 밖에 나가 무엇을 잡아 먹을 생각이 없어집니다. 알을 품고 지냅니다. 한달 후에 굶어 죽습니다. 그 사이 알은 부화되고 새끼들은 자기의 길을 갑니다.

동물들에게 이런 모성애가 있는데 우리 사람에게는 어떨까요? Oxytocin말고도 여러 기전으로 사람들도 모성애를 갖고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우리 인간에게도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이런 optic gland와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요?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우리 어머니들은 이처럼 모두 대단한 모성애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왜 두 어머니는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합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는 모두 모성애를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성애가 모세를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극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왜 비극으로 끝날수 있을까요?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모성애가 병들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모두 희생을 감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성애는 불행히도 병이 들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성애가 병이 들 때 그 두 어머니처럼 된다고 봅니다. 그들의 모성애는 병이 들었습니다. 결과 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반해 모세의 어머니가 소유한 모성애의 특징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 말씀으로 돌아 갑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석달을 키운 후 더 이상 법을 어길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아들을 보내야 할 때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아들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은 날 어머니는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그날 밤 어머니는 헤어질 것을 각오 했을 것입니다. 물론 모세의 누이를 뒤로 쫓아 보내긴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를 강에 띄우고는 어머니는 집으로 와서 또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세를 보낼수 있는 용기가 있었던 분입니다. 법을 어기는 것의 한계를 느끼는 분입니다. 함께 있다가는 함께 죽을 수 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헤어질 것을 결단합니다. 어떻게 보면 얌체처럼 생각됩니다. ‘버릴래면 일찍 버리지 이제 와서,’ 비판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두 여인이 모세의 어머니 보다 더 위대해 보일수도 있다고 봅니다.

과연 그럴까요? 모세의 어머니는 헤어질수 있는 힘을 소유한 분입니다. 그가 헤어질 수 있는 힘을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는 참 자신의 모습을 소유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모세의 어머니는 큰 슬픔 가운데서도 감사했을 것입니다. 석달 동안의 시간으로 인해서 감사했을 것입니다. 석달 동안 모세와 가졌던 추억으로 인해 감사했을 것이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추억을 키워 갈수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자신의 삶도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모세와의 석달간의 추억을 앞으로 남은 생애 간직하면서 살아갈 결심마저 했을 것입니다. 아들을 빼앗길수 밖에 없는 아픔을 안고 남은 평생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서 담대하게 살 것을 결단하셨을지모릅니다. 이젠 모세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려는 각오가 서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의 마음은 두가지가 뒤섞인채 홀로 눈물을 흐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딸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 옵니다.

“엄마 엄마 동생이 살았어. 엄마가 동생을 키우게 되었어.”

모세의 어머니는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딸은 차근 차근 설명합니다. 어머니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흐릅니다. 그리고 아이를 ‘let him go’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모세를 let go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축복을 받았을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모세의 어머니가 let it go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는 더 이상 모세에게 매어 있을 수 없는 자신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은 이젠 모세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야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의 핏줄에 흐르고 있는 강력한 희생의 홀몬은 그로 하여금 더 희생하라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헤어질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참 자신을 소유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과감하게 헤어집니다.

한편 그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벌이십니다. 모세를 찾게하셨고 자신도 찾게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와 헤어질줄 아는 어머니였습니다. 자신의 소중함도 잘 아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놀라운 어머니가 되어 간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와 두분의 어머니와는 많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잇점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세 분 모두 자녀를 끔찍히 사랑했습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법을 어겼습니다. 한편 모세의 어머니는 헤어질 때는 헤어져야 함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let it go합니다. 그런데 다른 두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끝까지 법을 어기면서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결과는 비참한 결과를 빚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없던 분들입니다. 그러기에 자녀들에게만 집착합니다. 곧 참 희생의 어머니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결국 자신도 망치고 자녀도 망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가 보여주는 참 모성애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하여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참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을 때만이 참된 희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법을 어기고 무조건 자신의 모습을 망치는 것이 참 모성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뚜렷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자신이 누구이고 그 참 자신을 스스로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만이 참된 희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모세가 그토록 훌륭한 지도자가 된 이유는 바로 참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는 어머니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기에 그는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를 때로는 강가에 버릴 줄 아는 어머니였기에 모세는 모세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어머니가 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참 자신의 모습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어머니 주일인데 마치 제가 어머니들에게 교훈하듯한 분위기로 말씀을 드리는 것 같아 민망스럽습니다. 사실 오늘 이 말씀은 어머니들을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자녀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어머니들은 희생을 몸에 안고 태어 나셨고 또 자녀들을 키우시면서 더욱 희생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어머니들은 참 자신을 잃었습니다. 희생에 노예가 되어 버리셨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들도 용기만 있었더라면 처음 소개한 두 여인처럼 되고도 남으신 분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어머니들은 참 자신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들은 많은 경우 참 자신을 회복하는 힘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누가 어머니들의 참 자신의 모습을 회복시키겠습니까? 자녀들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저는 지금 하얀 카네이숀을 달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많은 마음 속에 후회를 안고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저도 어머니의 희생을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 철이 들었을 때 어머니의 희생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연로하셨을 때 가급적 일년에 한 번씩 어머니를 뵈러 한국에 나갔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제가 해 드렸어야 하는 것은 어머니로 하여금 참 자신의 모습을 찾도록 도와드렸어야했던 것임이 아닌가 깨닫게 됩니다.

종종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보스톤을 방문하셨을 때 Ogunquit바닷가에 모셔 갔었습니다. 바닷가를 보시면서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나 같은 것이 대서양을 바라 보다니.” 자녀들이 어떻게 모셨으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종종 가슴 아픈 생각을 합니다.

교우 여러분, 특히 아직도 빨간 카네이숀을 다시고 계신 여러분, 어머니에게 참 자신을 세우게 해드리십시요. 여러분의 어머니의 핏줄에는 희생의 홀몬이 넘치게 흐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도움 없이는 어머니들은 참 자신의 모습을 되찾을수 없습니다. 이 홀몬의 힘을 이길수가 없습니다. 어머니의 삶은 자식이 없어도 그 삶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 드려야 합니다. 마지막 피클을 남기는 삶이 어머니의 삶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런 것보다 훨씬 큰 뜻을 소유한 분임을 알려 드려야 합니다. 대서양도 감당할 수 없으신 위대한 분이심을 알려 드려야 합니다. 대서양보다 넓은 어머니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 드려야 합니다. 그 때 세계를 구원하는 모세의 어머니와 같은 분들이 되어 가실 것입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용혜원 시인의 시를 소개해드립니다. 제목은 ‘자식된 도리를 언제나 할 수 있을까’

비켜갈 줄 모르고

다가오는 모든 고통으로

삶이 메말라

마음이 쩍쩍 갈라져도

눈물로 눈물로 적시며

이겨오신 어머니

가슴 깊이 멍들었던

아픔을 언제나

깨끗이 씻어 드릴 수 있을까

시련과 고통을 다 씻어 드려

환히 웃음지으실 수 있도록

언제나 할 수 있을까

조금만 잘해 드려도

그리도 좋아하시건만

늘 계산부터 떠올리는데

정말 언제나 자식된 도리를

다 할 수 있을까?

삶의 고통이 잦아지기 시작한

지금은

어머니의 허리만 구부정하게 되었는데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드려야 할 텐데

늘 죄송스런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어머니!

훌륭한 시입니다. 시인은 어머니의 희생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참 자신의 모습은 세워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우 여러분 어머니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감사하십시다. 한편 어머니의 참 모습을 세워드리십시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어머니도 모세의 어머니의 축복을 누리게 해드리십시다.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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