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7.05.06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여
성경본문 : 시편 118편 24절-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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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에 사는 세 자녀를 둔 어느 미국인 가정의 하루의 일과입니다. 오후 세시 방과 후 시간이 되었습니다. 14살난 Annie는 밴드 연습을 시작합니다. 건너 마을에서 11살 난 동생 Tim은 차 안에서 숙제를 하고 있습니다. 엄마와 함께 6살 난 동생 Teresa가 학교를 마치고 나오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Teresa가 나오자 그 아이를 태우고 재빨리 집으로 갑니다. Tim은 집에 가서 계속 숙제를 하고 있습니다.
오후 네시가 되었습니다. Annie는 cheerleading연습을 시작합니다. Teresa는 체조반에서 체조를 합니다. 오후4:45분 엄마와 Annie와 Tim은 빨리 저녁을 먹습니다. 15분 후 아빠가 귀가합니다. 아빠는 남은 음식으로 저녁을 대충 때웁니다. 곧바로 Annie를 데리고 성악연습을 갑니다. Tim은 야구연습을 하러 갑니다. 이 때 Teresa가 집에와 저녁을 먹습니다. 저녁 후 숙제가 시작됩니다.
6시에 Teresa는 피아노 레슨을 갑니다. 6:25에 Annie가 돌아 와 피아노 연습을 시작합니다. 6:45 Tim은 교회에 갑니다. 7:45 Annie는 숙제를 시작합니다. 막내인 Teresa가 취침 준비를 합니다. 아빠가 Teresa를 안아 잠들게 해줍니다. 8:30에 Tim이 귀가합니다. 드디어 여덟 가지 활동이 마쳤습니다. 또 다른 숨가쁜 하루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어떤 분은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듣기만 해도 숨이 가쁜데 실제로 이렇게 사는 이 가정은 얼마나 숨가쁠까?” 반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부럽다. 나는 어릴 때 왜 이런 교육을 못 받아서 오늘까지 이렇게 매사에 자신이 없는 삶을 살까?” 교우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제가 어릴 때 놀던 것중에 아직도 기억 남는 것이 있습니다. ‘땅따먹기.’ 아시는 분은 아실줄 압니다. 땅에 사각형을 그려 놓고 한 사람씩 자기 차례가 되면 자기의 영토를 넓혀 가는 것입니다. 재미있게 놀다가 아니 치열한 싸움을 하다가 어머니가 “밥 먹어라” 소리치시면 언제 놀았냐는듯이 뒤도 안돌아 보고 집으로 향합니다. 그렇게 살던 우리 세대는 어쩌면 지금 우리 자녀들이 부럽지는 않으신가요?
Univ. of Michigan에서 자녀들의 시간 사용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아이들의 시간 사용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12시간의 자유시간을 잃었다고 합니다. 반면 조직적인 운동경기나 운동구경시간은 30분에서 세 시간으로 늘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스스로 알아서 창의적으로 노는 시간은 없어지고 있고 어른들의 supervision아래 운동경기하는 시간으로 대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 가족들의 정기적인 식사시간은 심하게 줄었다고 합니다. 어느 분은 지금의 세대를 혹사받은 세대(abused generation)라고 표현하기 까지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잘 알았는지 미국 초등학교 교장연합회에서는 혹사받는 어린이들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한 어린이당 한 activity만 권장한다는 recommendation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내지 두번 정도만 activity에 참여 하도록 권장하였습니다.
펜실베니아의 어느 마을에서는 축구팀 부모들이 carpool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30분가야되는 원정경기면 carpool을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루는 자기가 하고 그 다음번은 이웃이 하고…. 한 번은 전학 온 학생이 축구팀에 속하게 되었는데 먼 곳으로 경기를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뭣도 모르고 이웃에게 함께 carpool을 하자고 건의했다가 차갑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들은 차 안에서만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지혜로운 결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저처럼 땅따먹기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교우님들, 아직도 오늘의 세대가 부러우신가요? 그러나 땅따먹기하던 세대가 더 낫다고 말씀드릴 수도 없다고 봅니다. 오늘의 세대를 혹사된 세대(abused generation) 라고 한다면 우리세대는 방관된 세대(neglected generation)라고 표현 할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어느 세대가 더 좋은 것인지 참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 주일로 지킵니다. 지난 주일 방관된 세대에서 자란 제가 혹사되는 우리 어린이들을 생각하면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사실 여러가지 감정이 오고 가는 일주일이었습니다. 본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집에 아이가 없는 가운데 어린이 주일 설교준비를 하는 주간이었습니다. ‘집에 아이가 없으니 과연 내가 설교할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에도 잠시 젖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더 저의 마음을 사로 잡은 생각은 방관된 세대에 자란 부모로서 자녀에게는 혹사시키는 교육을 시키지는 않았나 생각도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이것 저것 많이 시켰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일 말고는 아들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면 나도 모르게 아이를 어떤 의미에서는 매어 놓은 것이고 그것도 하나의 자녀를 혹사시키는 행위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자녀가 많아야 세명 대개가 두명인데 그렇다면 요즘 아이들은 어떤 면에서 부모님들의 과잉 관심가운데 지내게 될수 밖에 없는 상황인것 같습니다. 아니 방관할래야 방관할수 없는 상황인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자녀를 향하여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자녀를 대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의 자세를 알면 우리가 방관된 세대에 살던 혹사된 세대에 살던 언제나 가장 최고의 자녀 교육을 시키는 가정과 교회가 될줄 압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향하여 우리 교회 어린이들을 향하여 가져야할 마음의 자세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실 ‘어린이’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내용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말씀의 중요한 흐름에 어린이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곧 오늘 본문 말씀에는 어린이 교육에 관계된 주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첫 절은 제가 아주 좋아하는 귀절입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24절) 이 말씀을 보면 생각나는 것 두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제가 결혼 주례를 하면 이 말씀을 암송하므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암송한 후 하객들을 환영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말씀은 저에게 결혼식을 연상시킵니다.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는줄 압니다. 저의 아들 준석이와의 아침 인사입니다. 준석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제가 ride를 주곤 했는데 차에 타면 먼저 제가 입을 엽니다. “This is the day” 준석이는 이어서 “that the Lord has made” 제가 또 다시 “Let us rejoice” 준석이가 따라서 “and be glad in it” 이렇게 해서 아침 인사가 끝납니다. 이처럼 24절 말씀은 저에게 무척 친근한 말씀입니다. 요즘 이 말씀을 암송한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처럼 결혼식이나 아침 인사목적으로 쓰여진 것은 아닙니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오늘 말씀은 왕을 위한 예배에서 사용된 시편이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막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아울러 예배를 집전하는 제사장들은 감사하기 위하여 온 왕을 축복하는 노래였다는 것입니다. 곧 이 날은 왕이 감사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 온 날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 예배하러 성전에 들어 온 이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날이니 기뻐하고 즐거워하자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다. 왕이 예배하러 성전에 들어 옵니다. 이에 온 성도들이 전쟁에 승리한 왕을 축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얼마나 기쁘고 신나는 날이겠습니까?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 합니다. 그들의 기쁨과 즐거움은 어느덧 왕의 가슴에 새로운 응원가가 됩니다. “당신은 승리자이십니다.” 이 때 왕은 더욱 승리자가 되어 갑니다.
그러나 왕은 인간입니다. 연약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곧이어 왕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25절) 이 것은 이 예배를 집전하는 제사장들의 왕을 위한 기도입니다. 아니 이 기도는 왕이 전쟁에 나가 있을 때 아마도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왕을 위해 드리던 기도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막 승리하여 돌아온 왕을 위해 늘 하던 기도를 또 드리는 것같습니다. 왕은 제사장들의 기도를 들으며 새로운 용기를 얻습니다. 사실 우리가 용기를 얻는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너는 승리자야” 말해 줄 때 당연히 용기를 얻습니다. 또 하나 용기를 얻는 길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때 용기를 얻습니다. 제가 어릴 때 종종 어머니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곤했습니다. 삼사십년전의 모습이지만 그모습을 지금 생각만해도 용기가 생기곤 합니다. 삼사십년 전의 모습으로도 용기가 생기는데 하물며 바로 옆에서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이웃에게 용기를 주고 싶을 때 이 두가지를 조화있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당신은 승리자입니다.”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그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용기 백배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최고의 방법을 아직 하나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왕의 뼈 속 깊이 파고 들어가는 표현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용기 백배하지 못할 자가 없을 줄 압니다.
사실 구약 시대에는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자이었습니다. 왕들은 모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들입니다. 왕은 하나님에게로 온 자였습니다. 지금 제사장들은 이 사실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반면 왕은 이 노래를 들으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새롭게 다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자가 될 것을 혼자 결단하였을 것입니다. 또 다시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에 찹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이제 축복의 폭을 넓힙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왕을 축복하더니 갑자기 내용이 달라집니다.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갑자기 복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주석가는 왕과 함께 예배하러 온 왕의 신하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넓게 생각하면 ‘너희’는 왕의 국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지금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왕을 축복하면서 아울러 왕의 국민을 축복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축복하는 제사장들로 인해서 왕의 국민들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사실 왕 때문에 모든 국민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왕을 향한 마음의 자세가 왕뿐만 아니라 온 국민까지 승리의 확신에 가득차게 만든 것입니다.
처음 말씀드린대로 오늘 본문 말씀에는 어린이에 대한 주제는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제사장들의 왕에 대한 마음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우리 어린이들의 제사장이지 않겠습니까? 아니 우리 어린이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위한 제사장이길 바라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자기들을 위하여 ‘승리자’라고 부르고, 대신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라고 노래한다면 이것이 우리가 그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 우리의 자녀들은 어떤 세상가운데서도 승리하는 자들이 되지 않을까요?
어떤 분은 질문하실지 모릅니다. “자녀를 향하여 ‘승리자’라고 부를 수도 있고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할수도 있는데 어떻게 자녀들에게 감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선물을 안고 태어납니다.
얼마전 이런 글을 접해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우주는 당신의 선물을 기다렸습니다.” 곧 온 우주는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가져오는 선물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바로 금방 태어나는 아이들을 향한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아이들은 아니 우리도 그러했지만 하나님의 선물을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온 우주가 기다렸습니다. 수 천년 수 만년 기다렸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 노래는 이스라엘왕들에게 하기 전 세상 모든 어린이들에게 하는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자기만이 소유한 특별한 선물을 안고 이세상에 오니 어린이들은 모두 왕과 같은 자들입니다. 왕의 버금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에게 “승리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니 불러야만 합니다. 그러면 오늘의 말씀을 어린이들에게 하는 노래로 정리해 볼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 어린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승전의 기쁨을 안고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승전가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또한 더 큰 승리를 바라며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바르게 축복한다면 우리가 이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가 이들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거기에 맡게 노래를 부른다면 이들은 더 큰 승리의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승리의 주인공이 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였습니까? 혹사시키지는 않았습니까? 사실 우리는 방관된 세대에 속한 것이 불만스러워서 아니 방관된 삶을 살았기에 승리자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결국 반대로 우리의 자녀들은 승리자가 되게 하려고 혹사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와 다르게 혹사를 당하면 이 세상에서 승리자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와 다르게 많은 세상지식과 기술로 무장하면 승리자가 될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Barbara Ehrenreich라는 저널리스트가 있습니다. 몇년전 Nickel and Dimed라는 책을 써서 선풍을 일으킨 분입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자기가 minimum 봉급을 받는 일만 찾아서 일하며 살아가 봅니다. 결국 minimum봉급을 가지고는 아파트 렌트비도 내지 못한다는 결론을 냅니다.
최근 들어서 middle class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위 말하는 white collar일에 대해서도 책을 써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고는 white collar의 세계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는 두가지 결론을 내립니다. White collar 일을 구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White collar로서 성공적으로 직장생활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어려운 것을 밝힙니다.
이분은 저널리스트로서 늘 밖에서 보아 왔지만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음을 피부로 체험 한 것입니다. 물론 minimum봉급을 가지고 생활하기 어려운 것은 이해가 그래도 되었지만 좋은 대학교도 다 나오고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매일 매일 불안 가운데 살고 있음을 보면서 새로운 도전을 느낍니다. 곧 그는 세상 기술과 지식이 승리자가 된다는 보장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이 들어가야 할 세상이 바로 이런 세상이지 않을까요?
그는 몇 가지 예를 들어서 오늘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그는 ‘winning attitude’의 소유자를 필요로하는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승리자의 자세를 갖고 있는 사람을 세상은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고용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면이 일하다가 보이지 않으면 점점 그분의 입지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Chemistry matters more than skills.”(동료와의 관계가 기술보다 중요합니다.) winning attitude를 가진 사람들이 동료와의 관계도 잘한 다는 뜻이 내포 된줄 압니다.
저자는 이외에 또 한가지 요소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열정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열정이 없을 때 그 누구도 우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분은 비지니스를 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세운 전략을 믿으십시요. 그리고 그 전략에 대해 열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일을 하십시요.”
그는 이처럼 요즘의 세상은 winning attitude와 passion의 사람이 필요한 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용기를 마지막으로 덧붙칩니다. 용기를 가지고 어려움을 대처해 나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직장의 어려움을 이기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최고의 학력과 기술의 소유자를 위한 세상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이런 세상에 나가야 하는데 우리의 자녀들이 어떻게 winning attitude 와 열정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요? 첫 번째 소개한 그 가정처럼 하루 종일 뺑뺑이를 돌리면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왕들이 감사의 예배를 드리려고 성전에 들어 왔는데 제사장이 선언하는 것을 듣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왕의 마음이 어떠해졌을까요? 그의 가슴은 열정과 용기로 가득차고 어디를 가나 winning attitude를 갖고 살게 되지 않았을까요?
교우 여러분, 제사장들이 왕에게 선포한 것을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선포하여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유명한 작곡가 하이든은 자신안에 하나님의 선물을 누구보다 강하게 느끼며 산 분입니다. 하이든은 이러한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종종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힘들고 있을 때, 곧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히 연약해짐을 느낄 때, 더 이상 걸어갈 힘이 없음을 느낄 때, 내 안에 있는 작은 소리가 말을 합니다. ‘이 땅위에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고 있지., 슬픔과 염려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따라 다니고 있지, 아마도 너의 작품이 언젠가 그들을 위한 샘물이 되지 않을까? 그들이 너의 작품으로 인해 쉼을 얻고 삶의 용기를 회복하지 않을까?’”
하이든은 wining attitude를 소유한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이든이 어렸을 때 아마 누군가가 이러한 생각을 갖도록 말해주지 않았을까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의 자녀들도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은 사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인해서 이 제사장의 노래를 듣기에 합당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껏 우리 자녀들을 향하여 이 노래를 부르십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저희교회에서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두 달에 한 번 쉐마의 밤을 갖습니다. 함께 모여서 이 노래를 부르십시다. 우리의 자녀들은 최근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승리자들입니다. 이들이 참 승리자의 삶을 살게 하려면 우리들의 노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말씀을 거둡니다.
중세기에는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싸인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작품들은 하나님께서 온 것이기에 자신을 향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작품은 하나님을 향하여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싸인을 안했습니다.
Michelangelo도 싸인을 안했는데 유명한 pieta(마리아가 예수님을 안고 있는 조각)에는 싸인을 했다고 합니다. 남의 작품이라는 말들이 많이 들려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 싸인한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중세기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서 온줄 알았습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늘 메아리가 울려퍼졌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이러한 메아리를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싸인에 매어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이웃에게 선사하면서….
우리들의 어린이들도 이러한 삶을 살게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과 학식이기 전에 열정과 용기입니다. 그리고 승리자의 자세입니다. 우리들의 노래가 이들에게 이 귀한 것들을 심겨 줄 것입니다. 함께 우리의 자녀들을 향하여 노래를 부르십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