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07.04.22
설교자 : 이영길 목사
제목 : 복중에 짓기 전에
성경본문 : 예레미야 1:4-10
켄 가이어(Ken Gire)라는 분이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주님, 때로 냉담하거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주님이 무심한 에베레스트 산 같은 분이 아닌 것을 감사드립니다.
해가 빛나지 않을 때에도
해가 있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침묵하실 때에도
주님을 믿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침묵하실 때 우리까지 침묵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아무리 차갑고 깨진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할렐루야라고 노래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자인 켄 가이어씨는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책을 썼는데 마지막을 이와 같은 시로 그 책을 마칩니다. 저자는 삶 속에서 종종 말씀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느꼈던 것같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침묵을 자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했던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후 이 책을 써내려 갑니다. 그 중 그가 느꼈던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삶 안에서 침묵하듯이 에베레스트 산도 침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에베레스트산처럼 매정하신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베레스트산을 매해 많은 사람들이 정복을 하려고 시도합니다. 종종 목숨을 잃습니다. 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도 에베레스트산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안합니다. 산은 침묵할 뿐입니다. 아니 도리어 지금도 계속 에베레스트산은 매해 0.64센치씩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침묵은 에베레스트산의 침묵과 비슷하지만 그래도 침묵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임을 체험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이 무심한 에베레스트 산 같은 분이 아닌 것을 감사드립니다.”
사실 최근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모두 체험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우리 형제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할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나?’ 의문을 품을수 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줄인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막으실수 있으셨는데,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뉴스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첫번째 범죄 현장과 두번째 범죄 현장 사이 두 시간의 간격이 있었는데 그 사이 경찰은 아무것도 안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정보를 입수해서 엉뚱한 사람을 좇고 있었습니다. 두 시간 후 상상할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왜 하필 그때 엉뚱한 사람을 좇게 놓아 두셨을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대학교정뿐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한국에서까지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모두 다 한 가지 질문을 안고 기도회를 시작했고 계속 한 가지 질문을 안고 기도회를 마쳤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그 사건이 있은 후 어느 교우님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요점은 “우리가 이제 할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었습니다. 사실 그 교우님의 바람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 이외에 무슨 다른 것을 할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저나름대로 이해하기로는 ‘하나님은 침묵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기도를 또 다시 침묵으로 답하실테니 기도 이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저는 그 교우님의 이메일을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 생각과는 다른 의도에서 저에게 글을 보내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침묵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같은 질문을 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니 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들 앞에서 침묵하시나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침묵의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인듯이 보입니다. 4절에 보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살펴 보면 이 말씀은 침묵가운데서 하신 말씀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침묵이 온 이스라엘인들의 가슴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3절을 보면 이 당시 정황을 느껴 볼수 있습니다. “이 해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 포로가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가 되기 전에 먼저 일어난 사건은 쉽게 추측할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집니다. 성전에 있는 모든 것을 약탈당합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모두 하나님께 절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이까?”
요즘도 예루살렘에 가보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은 사실상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축대입니다. 성전이 없어졌으니 그 후로 유대인들은 성전을 바치고 있던 축대앞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아직도 성전이 있던 축대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 성전이 약탈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얼마나 그들은 절망했겠습니까? 그들은 부르짖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냥 약탈당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히 침묵하신 것은 아닙니다. 본문 말씀을 보니 하나님은 그 침묵 중에서도 한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저는 이 말씀을 저나름대로 이렇게 고쳐 보았습니다. “오랜 침묵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그러면 오랜 침묵 후에 어떤 말씀이 임하였을까요? 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아주 멋진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반응합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레미야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멋있어 보이는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듣길 원했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서 기다렸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이 곧 다시 세워지는 것을 보길 원했을 것이라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곧 너희 원수를 갚고 예루살렘을 회복하리라” 말씀하실 것을 바랬을 것입니다. 조금만 참으라는 말씀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침묵 후에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그야말로 동문서답입니다.
예레미야의 온 관심은 무너진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죽어간 동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너진 예루살렘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대신 예레미야에게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듣길 원했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침묵 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들려주길 원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교우여러분, 우리도 같은 경우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하나님께 원하는 대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엉뚱한 답변을 하시고 계시지 않으신가요?
사실 오늘 본문말씀은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침묵하십니다. 하나님은 침묵 중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통하여 침묵 중에 우리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시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침묵앞에서 절망하시고 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일이, 그것도 우리 한인 동포를 통해서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침묵에 깊게 잠긴 우리들에게 지금 엉뚱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다.”
그러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태어 난 다음에 알게 된 반면 예레미야만큼은 미리 아셨다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뜻도 내포 되어 있을줄 압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것보다 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침묵을 느끼는 자들에게 실로 하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이니다. “네가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다. 나는 바로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고 있었다.”
제가 필라델피아에서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을 때입니다. 남편을 먼저 하나님께 보내고 혼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홀로 된 교우님들을 위하여 열심히 섬기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의 간증을 듣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남편을 너무도 좋아하고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남편을 먼저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 분은 절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만을 지키십니다. 그러던 중 놀라운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절망 중에 서서히 일어 섭니다. 드디어 예레미야가 받은 확신을 받게 됩니다.
“네가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다. 나는 바로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고 있었다.”
이 번 버지니아 사건을 보면서 우리모두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 왜 그 선량한 젊은이들을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에 대해 하나님은 물론 침묵을 지키십니다. 침묵 중에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엉뚱한 답변을 주십니다. “네가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다. 나는 바로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고 있었다.” 우리들의 마음은 희생자들에게 가 있는 반면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향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종종 우리 주변에서도 아주 훌륭한 분들이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많은지 이런 말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God chose the best one.(하나님께서 제일 좋은 사람을 먼저 데려 가셨다는 뜻)”일 줄 압니다. 이런 말이 생겨 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좋은 사람을 먼저 데려가는 일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생겨난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남아 있는 우리는 별볼일 없는 자들이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같습니다. 곧 우리는 ‘왜 우리 처럼 별볼일 없는 자들은 안데려 가시고 쓸모 있는 자들만 골라서 데려가십니까?’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침묵하실까요? 스스로 자신을 별볼 일 없게 생각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다. 나는 바로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마음 속 깊게 받아 들이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레미야의 반응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는 반응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레미야는 자기는 무지 못난 자임을 고백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레미야는 심한 열등감에 사로 잡혀 있던 자 같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아이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예레미야는 마치 이렇게 고백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웬말입니까? 나는 열등감에 사로 잡혀 있는 보잘 것 없는 자입니다. 열등감으로 인해 언제나 자신이 없고 아무 말도 하질 못하는 자입니다. 나 같은 자가 선지자가 되라구요?”
사실 열등감의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지난 주 엄청난 일을 저지른 청년도 어떻게 보면 열등감에서 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열등감에 대해서 유명한 정신학계의 거성 칼 융(Carl Jung)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면 언제나 고칠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등감은 늘 우리들의 여러 속성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늘 변모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억압되어지거나 우리의 의식에서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될 때 고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이상하게 폭발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것은 무의식의 세계에 상처를 남겨 놓습니다. 중요한 공헌을 하는 삶을 잃어버립니다.”
칼 융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한 별 위험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모르게 열등감은 다른 형태로 바뀌어지고 때로는 우리의 깊은 무의식 세계에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삶을 살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열등감의 특징은 우리로 하여금 훌륭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치고 훌륭한 일 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등감을 잡아내야하고 그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을 잡아내지 않고 있으면 언젠가 자기도 모르게 깊은 무의식에 상처를 주는데 그러다가 이상한 일을 저지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나는 이것밖에 안되’하면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여러분은 자신을 망치는 것이고 사회를 망치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에 큰 물의를 빚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언제나 그러한 가능성은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등감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에 아무런 공헌을 하지 못하게 할뿐 아니라 자신을 병들게 합니다. 언젠간 자기도 모르게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열등감을 해결할까요? 하나님의 침묵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네가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다. 나는 바로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고 있었다.” 그 때 우리 안에 숨어 있던 열등감은 밖으로 노출됩니다. 그 때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 때 열등감은 치료되기 시작합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갑니다.
이처럼 열등감이 노출된 자들에게 하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열등감을 내보이는 예레미야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7, 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열등감이 밖으로 노출된 자들에게 하나님은 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임을 알려주십니다.
지난 주 수요여성성경공부에서 어느 교우님이 은혜로운 간증을 하셨습니다. 교우님이 속한 선교단체에서 중국에 선교를 가게 되었는데 함께 가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교우님에게 큰 기도제목이 생겼습니다. 아직도 중국은 선교의 자유가 없는 나라가 아닙니까? 아무도 성경이나 그와 관련된 서적을 갖고 들어갈수가 없습니다. 이 교우님이 쪽복음을 가져가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교우님은 당황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들고 들어가다가 들키면 감옥에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분은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슬프도소이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 알지 못하나이다.”
가족들도 이 사실을 알고는 말리기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고민 고민하였다고 합니다.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I am chosen.”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기에 나에게 이일을 맡기셨구나.” 그리고는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감옥에 가도 좋다. 나는 들고 가겠다.” 어떻게 되셨을까요? 종교서적을 들고 무사히 공항을 통과하여 들어 가셨습니다. 그러기에 지난 번 간증을 하신 거죠. 그런데 선교단원들과 함께 짐을 푸는데 알게 된 것은 교우님만 종교서적을 들고 들어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다 나누어서 갖고 들어오는 줄 아셨던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배신감을 느끼셨지만 곧이어 다시 생각난 것은 “Yes, I am chosen.” 교우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네가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다. 나는 바로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고 있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그러면 이런 확신이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축복을 주실까요? 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자신이 택함받은 것을 알고 또한 열등감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말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손을 내밀어 그들의 입에 대십니다. 그리고 그 입에 당신의 말씀을 주십니다. 또한, 그들을 향하여 선포하십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열등감에 사로잡혔던 자가 열등감을 사로잡은 자가 되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만국을 해치는 자가 되었었는데 택함 받은 자기자신임을 깨닫고 열등감을 사로잡은 자가 되었을 때 도리어 만국을 세우고 건설하는 자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에스라서에 보면 예레미야가 만국을 건설하는 자가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에스라서 1장 1, 2절 말씀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예레미야의 입에 두신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가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대로 이스라엘은 70년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이제 해방이 된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예레미야의 입에 담겨졌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침묵앞에서 괴로워했던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은 위대한 민족 이스라엘을 버리시는가!’ 절규했던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며 절망가운데 빠져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임을 발견합니다. 동시에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열등감을 발견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의 입에 당신의 말씀을 주십니다. 예레미야는 그 말씀으로 좋은 나라는 일으키고 악한 나라는 멸망하게 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새로이 건설합니다.
예레미야는 진정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괴로워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메세지를 주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우리가 바로 역사의 주인공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지난 주 이 땅위에서 피를 흘린 젊은이들을 위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리 크리스챤들은 매일 십자가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침묵 속에 깊게 서 있노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라 말씀하십니다. 사순절을 금방 지낸 우리들이지만 아직도 십자가 앞에서 제대로 하나님의 침묵을 느끼지 못하기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안 아실줄 압니다.
교우 여러분, 33명의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 깊게 빠져 들어 가 보십시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지난 달 제가 극진히 존경하던 안태호 목사님이 소천 받으셨습니다. NKPC에 속한 모든 교회 목사님들이 큰 애도를 표했습니다. 최근 안목사님은 불편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교계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작년 11월에는 저와 함께 한국에서 이민 목회 세미나를 인도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하실 분인데 59세의 나이로 저희 곁을 떠났습니다. 사실 세상을 떠나시기 번 두 달 동안 병상생활을 하셨습니다. 본교회 교우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안 목사님의 회복을 위해 기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환송예배에 참석한 모든 분들의 마음속에는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훌륭한 목사님이…?” 사실 저도 지난 주까지 이 질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설교 준비하던중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처음 읽어 드린 시를 다시 한번 읽어드림으로 오늘 말씀을 거두겠습니다.
주님, 때로 냉담하거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주님이 무심한 에베레스트 산 같은 분이 아닌 것을 감사드립니다.
해가 빛나지 않을 때에도
해가 있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침묵하실 때에도
주님을 믿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침묵하실 때 우리까지 침묵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아무리 차갑고 깨진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할렐루야라고 노래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